꿈결에도 그리운 배승태 동무에게
동호는 지금도 옛날 어느 겨울밤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배승태가 서울 상부기관에서 조사를 받고 강릉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지 한 달쯤 지나서였다. 그날 밤 동호는 여느 때처럼 밤이 깊어서야 배승태가 입감된 11호 독방을 찾아갔다. 그런데 웬 일인지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이북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한 모양이었다. 북한에는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이 하나 있는데 배승태는 행복했던 추억담을 틈이 날 때마다 자랑삼아 지껄이곤 했다. 특히 아내 윤희정의 모습을 회상할 때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달밤에 집체로 춤 출 때는 안해가 젤 고왔디랬시오.”
윤희정은 보기 드문 미모인데다 대학을 나온 지성인이며 성분이 좋은 당 간부의 딸이었다. 포항에서 초등학교만 나와 농사를 짓다가 의용군에 입대한 배승태로서는 훗날 북한에서 대학에 다니는 혜택을 입긴 했지만 너무 과분한 배필이었다. 하지만 남파 요원으로서는 그만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다. 젊은 남녀들은 대개 학교나 작업장이나 영화관 같은 데서 만나거나 책을 빌려주는 구실로 만나 연애하는 게 보통이지만 특수요원의 경우는 선택된 처녀를 중매 형식으로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
“첨엔 편지로 마음을 전했디랬시오. 기러다가니 동뚝 같은 조용한 데서 만나곤 했시오.”
배승태는 윤희정과 만나던 장면을 떠올리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단신으로 의지간 없이 지내온 터라 아내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아내의 숨결과 체취를 맡아야 생기가 살아났다. 아내는 분신이나 진배없었다. 윤희정이 잠시 문밖만 나가도 “날래 다녀오기오.”를 반복했고 그녀가 곁에 없으면 불안하고 허전했다. 배승태는 지금도 윤희정이 써 보낸 연애편지를 달달 외울 정도로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날 밤 배승태는 윤희정의 연애편지 첫 구절을 종이에 적어 동호에게 직접 읽어주기까지 했는데 목소리가 떨리고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꿈결에도 그리운 배승태동무에게” 라고 쓰기 시작한 윤희정의 편지에는 전투적인 내용이 다분했다.
오늘도 잎새 푸른 훈련장을 결전의 전야로 신천의 언덕으로 생각하고 무거운 혁명위업의 대로 속에 자신을 세우며 산야를 주름잡아 달리는 동무에게 어제인 듯 아니 방금인 듯.....
배승태가 윤희정과 처음 만난 곳은 동뚝길이었다. 동뚝은 새로 정리된 논둑이나 개울둑처럼 생겼으며 폭이 넓고 높아서 적의 탱크 등 공격 병기의 전진을 막는 방어벽 역할도 했는데 청춘 남녀들은 대개 그런 조용하고 은밀한 곳을 만남의 장소로 애용했다.
“색자를 신고 옹근달빛 속을 걸어오는 안해의 모습은 선녀 같았시오.”
꽃신을 신고 보름달빛 속에 나타난 윤희정은 배승태의 머릿속에 가장 추억 어린 화면으로 각인되었다. 그 화면은 세월이 흘러도 색깔이 바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 모양, 머릿결, 잘록한 허리, 걸음걸이, 목소리, 발자국 소리, 치맛자락의 흔들림, 흰줄이 그어진 검은 헝겊신, 달빛이 자욱한 동뚝길 등 그 모든 색깔과 소리와 향기는 바로 배승태의 체질이 되었다.
“윤희정 씨와 처음 만났을 때의 정황을 더 듣고 싶네요.”
동호가 궁금증을 드러내자 배승태는 서슴없이 윤희정과의 처음 만났던 장면을 설명해주었다.
“남파되기 반년 전이었이오. 개나리꽃이 만발한 동뚝에는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디오. 기때 우린 새싹이 돋아나는 동뚝에 나란히 앉았더랬는데, 무슨 말로 첫마디를 꾸밀까 하다가니 희정동무레 꽃치마가 황홀합네다. 그랬디오.”
윤희정이 민망한 표정을 짓자 배승태는 자기의 첫마디가 좀 어색하다 싶었는지 이런 말을 보탰다.
“아바디께서 당 사업을 하신댔디오?”
그러자 윤희정은 당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큰아바디가 당일꾼이시고 아바디는 기업소 직장장입네다.”
“희정 동무의 집안이 자랑스럽습네다.”
“승태 동무와 결혼하믄 더 자랑스럽디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배승태는 말문이 막히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별이 돋아나있었다. 윤희정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무슨 별자립네까?”
“밝은 걸 보니께니 북두칠성 같습네다.”
“아바디께서 말씀하셨디오. 승태 동무레 저런 별이 될 거라구요.”
그 말에 배승태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팔뚝에 힘줄이 솟았다. 몸도 떨렸다. 윤희정은 배승태의 손을 잡아주며 굳센 목소리로 말했다.
“승태동무레 수령님께 감사햐얍네다. 중학교도 못 다닌 동무를 수령님께서 대학에 보내셨잖습네까. 대학생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학생으로 키우셨잖습네까. 기러구 인민의 영웅으로 만드셨잖습네까. 저 하늘을 보시라요. 승태동무를 저 별처럼 키운 분이 바로 수령님 아니십네까? 기러티오?”
배승태는 자세를 곧추 세우며 군인이 상사에게 보고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레 위대하신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최수복 영웅 같은 전사가 되겠습네다. 충성의 열다섯 발자국을 찍은 그 자욱 그 자세처럼 달리고 또 달려서 조국통일 과업을 이루겠습네다. 기러구 그만한 정신으로 윤희정 동무를 사랑하겠습네다. 희정동무레 꽃처럼 별처럼 곱디오.”
배승태는 가슴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숨이 막혔다. 하늘에 대고 수령님 고맙습네다 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는 삼베 누더기를 걸치고 나뭇지게를 지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고향 들판에서 자기네 논은 한 다락도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장돌뱅이가 된 것도 농사치를 장만하고 싶어서였는데 장돌뱅이가 되어야 세상사에 눈을 뜰 수 있고 눈을 떠야 잘 사는 궁리를 할 수 있었다. 물감 통을 메고 장터마다 찾아다니며 형형색색의 안료를 팔아온 지 십년이 가까워질 무렵 아버지는 열일곱 살 된 배승태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남들은 의용군 입대가 끌려가는 입장일 테지만 너는 자원하는 입장이 돼야 한다. 영광스런 선택 말이다.
“오날 윤희정 동무를 만난 건 제 아바디 공로디오.”
베승태는 윤희정의 손을 덧싸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따지고보면 의용군 자진 입대를 권장한 아버지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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