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59회)
행사 때문에 귀가한 착한 아내
1991. 6. 3
영채와 천마산에까지 드라이브했다. 새로 구입한 그랜저 승차감이 고급차답게 묵중하다. 천마산 기슭에서 함께 보내다가 새벽 2시경에야 영체네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내가 영채네 대문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차로 달려왔다. 셋이 정면으로 맞닥뜨린 셈이다. 나는 우선 영채를 집안으로 돌려보내고 수니를 타일렀다. 1시간가량 설득시켜 집으로 데려왔다. 나는 아내에게 한번 자유롭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수니는 배신을 당했다고 하지만 나는 오해라고 설득했다. 사실 나는 영채보다 수니를 택하고 싶었다.
1991. 6. 4
수니가 집을 나갔다. 보고 싶다. 방이나 뜰과 모든 공간이 수니의 환영뿐이다. 23년 간 살아온 세월의 때만은 아닌 듯싶다. 나는 그녀를 사랑해 왔던 것이다. 그 사랑의 조건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연민이나 동정의 감정은 절대 아니다. 믿음으로만 생각해 왔는데, 그게 바로 사랑이었던 것이다. 수니의 순결성 때문이다. 내가 순결한 만큼 그녀가 순결해서이다.
수니야, 제발 타락하지 말아다오! 네가 타락하면 나는 금세 썩고 만다. 그것이 내 도덕이다.
오후에 영채한테서 전화가 왔다. 영채를 만나 서울대 뒷산 그늘에서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아침에 잡지사 기자들이 찾아와 15일 만에 도망쳐 나온 호텔업자와의 결혼 파탄을 취재했다며 골치 아파했다.
1991. 6. 5
새벽. 온종일 기다렸지만 수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슬픈 마음에 함부로 처신할까 봐 걱정이다. 그녀의 도량 있는 처신이 늘 나를 감동시켰는데.....
수니는 옛날의 그녀로 남아야 한다. 나는 그런 수니를 사랑해 왔다. 도량 있는 처신이 나를 감동시켰다. 이 세상 어느 여자도 수니만큼 내 마음속에 젖지는 못할 것이다. 수니는 내 아내다.
밤에 수니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모래가 보리회 모임이어서 돌아가기는 하지만 아주 귀가하는 건 아냐.”
1991. 6. 6
수니가 집을 나간 지 이틀 만에 돌아왔다. 오후 내내 둘이 영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아내에게 끝마무리할 시간을 달라고 사정했다.
1991. 6. 7
새로 신축한 춘천옥에서 정호승, 김주영, 김원일, 박덕규, 이동하, 정소성, 홍상화 등 30여 명의 보리회 회원이 회식을 가졌다. 수니가 승가사에서 돌아와 일을 봐주는 바람에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만약 아내가 귀가하지 않았다면 모두 아내를 찾을 텐데 큰일이었다. 아내의 순수하고 덕스러운 인상을 누구나 좋아했다.
1991. 6. 15
영채는 자기가 만든 형식주의와 나르시시즘에 빠져 그 기준에 따라 남을 평가한다. 나한테는 안 그러지만 그녀의 그런 방자함이 실망스럽다. 나는 광화문 도로 복판에서 차 브레이크를 밟으며 “내려!” 하고 화를 낸 적도 있었다. 그녀는 기가 꺾기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영채는 너무 독선적이다. 그게 싫다. 나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채는 내게 “사랑한다.”며 손목을 잡아주었다.
1991. 6. 20
하룻밤 사이에 90페이지 분량의 단편을 완성했다. 「팔라니트」 소재는 어저께 영채가 <아미가>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해 준 체험담이었다.
영채는 내가 수니와 헤어지지 못하는 그 엉거주춤에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1991. 6. 24
2박 3일 동안 문화재보호협회 주관으로 소설가, 시인, 평론가 20여 명과 함께 강진 해남 지역 유적을 답사하고 돌아왔다. 김용성, 김주영, 김원일, 심상대, 감태준, 외국어대 이탄 시인, 문학수첩 김종철 시인(훗날 『해리포터』 출간으로 대박), 고려대 최동호 평론가, 연세대 정현기 평론가, 박상우, 유순하, 최용운 등이 참여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준섭 아빠가 운전해서 내 차로 다녔다. 하지만 그렌저를 타고 버스 뒤에 따르는 것이 좋지 않아 나는 버스팀에 동승해서 다녔다.
다산과 윤선도의 유적과 강진의 고려청자 도요지를 둘러보았다. 호남 남부 지역은 처음 다녀보는 셈이다. 모든 사람들이 아내의 인상이 좋으시다며 호감을 표시했다. 중앙일보 이경철 기자와 한국일보 정 기자가 특히 나를 좋아했다.
1991. 6. 25
또 세무조사를 받았다. 손님 많은 식당이라 세무조사는 연례행사나 다름없다. 추징금이 얼마 나올지 모르겠다. 카드가 없는 시대라 모두가 세무서에서 인정과세로 세금을 내게 되었다. 우리 업소를 오히려 봐주고 있다. 그러니까 1990년도까지 조사가 완료되어 일사부재리원칙의 덕을 보게 된 셈이다.
1991. 6. 30
보름 만에 우리교회에서 영채를 만났다. 나는 20여 분 늦게 도착했다. 영채는 예배실 중간쯤에 앉아 있었다. 나는 복도로 그녀를 스쳐지나 앞자리에 앉았다. 예배를 마치고 교인들과 악수를 나누며 영채 쪽으로 다가가자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때 나는 분명 보았다. 그녀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지만 눈에 눈물이 젖어 있었다.
둘이 커피숍에 가서 그녀 친구(「팔라니트」의 주인공 소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영채한테서 밤에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현대문학>에 발표한 내 단편「팔라니트」를 읽고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1991, 7. 4
영채를 만난 것은 내 작품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러던 차에 <현대문학> 7월호에 실린 김윤식교수의 <퇴폐미학의 근원을 찾아서>를 읽고 큰 위안을 받았다. 나는 이미「팔라니트」를 장편으로 구성하고 있었다.
.....아포리즘적 문체, 데카당한 삶의 방식, 그 속에 깃든 자살 충동, 그 주변을 에워싼 낯선 미학과 감각적 표현 등은 이야기 중심 소설이나 역사 사회적 문맥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리얼리즘계 소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私小說이란 일인칭 삼인칭과 무관한 것, 작가가 자기의 삶을 그리는 것과도 무관한 것, 작가의 “내면 풍경” 드러내기와도 무관한 것.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과 생애가 가장 적절한 해답인 것. 곧 한 작가가 어쩔 수 없는 삶의 충동에서 작가(예술가)임을 인식, 예술을 위해서만 살고자 함. 따라서 삶을 한갓 예술의 수단(부속품)으로 보는 삶의 태도를 선택했을 때 가능한 소설을 두고 사소설이라 한다. 김윤식 교수(서울대)의 그 말은 나를 두고 한 말 같았다. 내가 그렇다. 나는 정말 내 문학을 위해 사는 셈이다.
1991. 7. 10
내 딸 유라는 밤낮으로 디자인 공부에 열심이다. 그놈에게 일반교양 실력이 적어 걱정이다. 그놈은 독서를 해야 할 텐데.
1991. 7. 17
그동안 영채와 다시 만나 몇 군데를 여행했다. 그녀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자기 부모와 함께 파리에 다녀오자고 했다.
며칠 전 연세대 전규태 교수의 행사 모임에 나갔다가 영채를 만나는 바람에 어제 우리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전규태 교수는 내 작품을 ‘한국 최고’라고 과찬한 평론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