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62회)

충남시대 2025. 3. 17. 16:36

 

1991. 8. 10
유라가 가엾게 느껴져 대학생인 딸에게 “아가”라고 불러보았다. 에미 없는 유라의 모습을 보니
더 화가 치밀었다.
“내일 까지 집에 안 들어오면 진짜 헤어진다!”
그 말에 어이없게도 유라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엄마 찾으면 화 안 낼 거지?”
나는 유라를 얼러 말을 유도했다.
“엄마가 집에 왔는데 왜 싸워. 아빠가 잘못해서 엄마가 나갔는데. 너도 엄마 오면 더 잘해드려.”
“승가사에 갔어.”
114 안내전화로 번호를 알아내 승가사로 전화를 걸었다. 여수니란 여인을 물었더니 대뜸 “김용
만 선생님이시죠?” 하고 묻는다. 종남스님이라고 했다. 당장 승가사를 찾아가 종남스님을 찾았다.
승복을 입은 젊은 여승은 나를 반기며 자기 승방으로 안내했다. 시원한 장판방에 앉아 불교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님은 자기도 소설을 쓰고 싶었노라며 내 작품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헤어질 무렵의 아내 거처를 물었다. 며칠 전에 승가사를 떠났는데 행
선지는 모른다고 했다.
“머리를 깎아달라고 졸랐지만 원래 작가는 그러하니 금방 마음이 돌아설 거라고 타일렀죠.”
나는 아내의 소식을 모른 채 그냥 집에 돌아와 유라를 다그쳤다.
“왜 진작 아빠한테 말하지 않았어? 나도 집을 나갈 테니 너 혼자 살아. 이제 네 엄마는 남이야.”
그렇게 겁을 주면서도 유라의 표정을 몰래 훔쳐보았다.
“도산대로에 있는 빌라에 있어.”
당장 청담동으로 차를 몰았다. 깨끗한 오피스텔 고층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침대와 소형 냉
장고까지 사다 놓았다. 기가 막혔다.
1991. 8. 22
고르바초프를 축출한 소련의 구데타가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자칫 인류의 역사가 또 한 번
진통을 겪을 뻔했다.
1991. 8. 29
오늘 세계사적인 일이 벌어졌다. 소련 최고회의가 소련 전역에 공산당 활동 정지를 가결한 것이
다. 3일간의 보수파 구데타 이후의 일이다.
1991. 9. 22
추석날이다. 새벽 4시까지 현대문학에 제출할 장편소설을 썼다. <현대문학> 주간인 감태준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처음 써보는 장편이라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단편「그리고 말씀하시길」의
호평에 금이 갈까 봐 걱정스럽기도 한다.
1991 12. 3
현대문학사에서 제정한 새로운 작가상에서 결선까지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지나친 과욕이었다.
장편을 습작해보지도 않고 의욕만 앞섰던 것이다.
이문열과 통화했는데 그는 내 작품을 심사하기 위해 밤새 읽었다고 한다. 고맙고 부끄러웠다.
1991. 12. 7
파리 아들네에 다녀온 영채 어머니한테서 알프스 산 수정 돌을 선물로 받았다. 한 달간 파리 아
들네에 갔다가 스위스에서 안종대와 함께 샀다고 한다. 나는 안종대의 그림 “공간변주 연작”을 샀
었다. 그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화가였다. 도포를 입고 파리 시내를 거닐 정도로 괴짜다.
1991. 12. 9
수니와 밤늦게 드라이브했다. 남한산성, 팔당, 양수리를 거쳐 춘천까지 4시간 동안 함께 달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나쁘다.
1991. 12. 19
유 목사와 영채 형제들 셋이 내 서재가 있는 서초동 별채를 찾아왔다. 파리에서 온 동생 안종대
화백이 무척 반가웠다. 순수한 예술정신에서 동질감이 느껴졌다. 우리 집 벽에 붙은 대형 연작「공
간변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찾아왔다고 한다. 그의 초기작품인 두 폭짜리「공간변
주」의 주제에 대한 내 질문에 동생은 “공간을 채우는 개념이 아니라 채워진 공간을 지우는 행위.”
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지우다가 흐른 부분을 흑백으로 칠했으며 그 공간을 한정하는 선은 늘 황
금분할선을 이탈하는 구도”라고 말했다. 그 이탈이 그의 전위적 성향인 셈이었다. 그는 서재에 걸
려있는 내 고교시절 지리산에서 농촌계몽활동할 때 그린 소나무를 보고 “놀라운 구도”라고 극찬하
며 벽에 걸린 소나무 그림을 떼어내 가까이에서 바라보기도 했다. 모처럼 내가 바라던 향기 나는
시간이었다.
영채 가족과 나는 거실 소파에 둘러앉아 떡을 먹으며 요즘 세계를 놀라게 한 소련 붕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련 수상 고르바쵸프의 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그라스노스트) 정책으
로 소련이 붕괴되고, 고르바초프를 축출한 소련의 보수파 구데타가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는 얘
기가 대화의 주축을 이루었다.
“냉전체계를 완화시킨 소련의 개혁 개방 정책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해요.”
내 말에 영채가 소련의 명칭과 소련에서 떨어져 나간 나라들을 물었다.
“소련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줄임말이고 이번에 연방에서 떨어져 나간 나라는 우
크라이나를 비롯하여 벨라루스,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아르메니
아, 그루지야, 그리고 발틱 3국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인데 그루지아는 국명이 죠
지아로 바뀌었죠.”
“그럼 붕괴 원인은 뭐죠?”
“한마디로 참혹해진 경제 탓이죠. 오이 한 개를 사려고 긴 줄을 서야 될 정도니까.”
1991. 12. 20
드디어 할 일이 생긴 것 같다. 교회에 혁명을 일으키자! 정직한 교회를 만들자!
1991. 12. 21
현대문학에서 내 연재 장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잔인한 신앙>을 고쳐 싣기로 했다.
지난번 심사위원 4인의 평은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조남현 서울대 교수의 평은 큰 참고가 되
었다.
오랜만에 김원일과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집에 돌아와 작품 구상을 하다 이문열의
장편『시인』을 읽었다.
1991 12. 24
나에게 드디어 무슨 큰 조짐이 보였다. 내 고통론과 기독교와의 관계는?
영화 <베드로와 바울>을 보려고 하는데 수니가 극구 말린다. 다른 프로를 보겠다고 한다. 자기
입장에서는 처절한 몸부림인 셈이다. 내 불교적인 정서를 그대로 유지시키려는 몸부림이랄까? 우
리가 불교식으로 결혼도 했지만 무엇보다 기독교인인 영채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영채에게 마지막 편지를 써서 우체국에서 등기 속달로 부쳤다. 그녀가 가여웠다.
늦게 전화녹음을 트니 유도순 목사와 영채의 목소리가 들어 있었다. 유 목사는 내일 성탄일 11
시 예배를 함께 보자고 했다.
1991. 12. 25
우리 교회에서 11시 예배를 보았다. 찬송가 144절을 부를 때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유 목사는
설교 중에 내가『이스라엘의 슬픔과 영광』에 발표한「겟세마네교회에서 흘린 이상한 눈물」에
대해 오래도록 설명했다.
1991. 12. 27.
내 2층방(사무실)을 정돈하고 책상 옆 한갓진 구석에 ‘기도소’를 마련했다. 이스라엘에서 사 온
촛대에 촛불을 켜놓고 기도했다.
“주여! 제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영화 <벤허>의 배경음악이 내 감정을 짙게 물들인다.
1992. 1. 13
성경을 읽는 내 모습을 마뜩잖게 지켜보고 있던 수니가 이틀간 양구에 다녀오겠다고 한다. 분위
기를 바꿔주고 싶어 음료수를 사 오라고 했더니 그것만 사다가 놓고 떠나버린다. 아내의 뒷모습이
슬퍼 보인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영채와 점점 멀어지고 있는데, 안타깝다. 수니는 내가 기독교인
이 되면 자기와의 결합에 금이 가는 줄로 여기는 모양이다. 왜 그처럼 내 마음을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