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 자서전

이상헌의 인생 이야기 아버지와 나의 삶 (Ⅰ)

충남시대 2025. 3. 17. 16:41

아버지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며 한편으론 무서운 느낌을 받는다. 가난으로 점철된 삶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애는 쓰셨지만, 자식들에게 그다지 도움은 주지 못했다. 일흔한 살에 세상을 뜨셨는데 한번 호강도 하지 못하고 여행도 하시지 못하셨다. 그 시대에 어른들은 다 그랬다. 나도 교직에서 정년퇴직하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중 아버지와 나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쓰기로 했다.
 아버지의 원적은 경상북도 의성이다. 할아버지와 대고모부가 가산을 팔아 독립운동을 하는 데 보탰다. 빈털터리인 할아버지는 식솔을 이끌고 만주 하얼빈으로 떠난다. 만주에서 정착하고 살다가 아버지가 결혼할 나이쯤 돼 며느리를 물색하기 위해 할아버지 외사촌이 사는 공주로 온다. 한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중국에서 사업을 하여 큰돈을 벌었다는 할아버지가 아버지 자랑을 늘어놓았다. 같이 술 마시던 외할아버지를 만난다.
“만주에 있는 울 아들이 사업을 해 큰돈을 벌어 떵떵거리며 사는데 좋은 규수를 구하러 왔소만.”
이 말에 외할아버지는 얼른 말을 되받았다.
“우리 집에도 가르치지는 못했지만 똑똑하고 얌전한 딸이 있소이다.”
이렇게 쉽게 혼담이 오갔다. 당시 일제는 위안부 모집으로 처녀를 모으고 있어 어느 때 끌려갈지 모르는 상태라서 어머니는 열일곱 어린 나이에 만주로 시집가게 되었다. 시집가기 싫다는 어머니는 매일같이 울었고, 바로 밑에 큰 이모는 언니가 시집 안 가겠다면 자신이 시집가겠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아닌 만주로 시집을 가서 여행도 하고 그런다는 생각을 가졌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는 한국으로 돌아와 혼례를 치르고 어머니와 함께 만주 하얼빈으로 떠났다. 내가 어렸을 적 동네 사람들이 어머니를 ‘만주 댁’으로 불렀는데 왜 ‘만주 댁’으로 불리는지 몰랐다. 그렇게 그 추운 만주 하얼빈에서 8년을 살았다.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추운 겨울은 가장 힘들었다. 겨울은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길었다. 겨울의 화장실은 대변을 보자마자 얼어 화장실에는 으레 도끼가 있어 일을 보곤 도끼로 대변의 예봉을 부러뜨려야 다음 사람이 일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추웠다. 거기서 딸 민자를 낳았다. 잘 먹지도 못하여 젖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힘든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기는 정말 어려웠다. 영양실조인지 첫 번째 애를 가지고 8년 동안 아이가 없었다. 드디어 1945년 해방이 되자 다른 사람들은 조국 대한민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국에 돌아가봤자 논밭 한 뙈기 없이 어려운 살림살이는 만주나 똑같다며 귀국을 미뤘다. 소련군이 하얼빈지역을 점령하여 시계 등 물건을 약탈해가며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귀국을 결심한 것은 해방 이듬해 1946년 여름을 정하여 간단한 이불이며 옷가지를 준비해 어려운 귀국길에 들어섰다. 여름을 택한 것은 그리 춥지 않아 노숙할 수 있는 장점이 그 이유였다. 할아버지, 큰아버지 등 가족이 귀국을 결심한 상태를 하게 고모님과 삼촌 한 분은 중국에 남기로 했다. 고모님은 고향이 함경북도인 고모부를 만나 임업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여 귀국을 포기하였고, 삼촌은 중국이 좋다며 가지 않겠다고 하여 일부는 만주에 남고 일부만 귀국하기로 하였다. 귀국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하얼빈에서 단둥까지는 기차를 타고 와서 수월했지만, 공산 치하의 북한에서는 걷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이동하는데 엄격한 상태는 아니어서 삼팔선까지는 무사히 왔다. 철조망이 쳐진 삼팔선은 군데군데 보초병이 있어 넘기가 어려웠다.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