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 자서전

이상헌의 인생이야기 아버지와 나의 삶 (Ⅲ)

충남시대 2025. 3. 17. 16:43

아버지는 처남이 처형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구해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한동안 안타까워했다. 슬픔에 잠길 겨를 없이 아버지는 후퇴하는 군경을 따라 금산으로 익산으로 전남으로 이동하며 공산군과 어려운 전투를 했다. 어머니와 외가 일가는 낮엔 부엉골 금광으로 피신했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좌익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주와 우익을 잡아내려 혈안이 되었지만, 외갓집은 방앗간을 하여 풍족하게 살며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가난한 집과 아이 출산한 집에 미역과 쌀을 퍼다 주는 등 선행을 하여 무사히 그 어려운 전쟁을 이겨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처형된 큰외삼촌과 정혼했던 아가씨를 만나 무척 괴로워했다고 외할머니께서 말씀해주셨다. 그 후 외삼촌과 가장 친해 자주 집에 놀러 오던 친구, 같은 보도연맹원이었던 친구를 만났다.
“어이구, 자네는 살아 있었구나.”
라는 말과 함께 정신이 혼미해져 그 후 정신줄을 놓았다. 외할아버지는 생떼같은 장성한 아들을 잃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로 돌아가실 때까지 그 증상이 이어졌다. 나중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디 먼데 가서 한 이틀 있다가 돌아오시는 날은 으레 외할머니가 오셔서 우릴 돌보아줬다. 외할머니는 처형된 큰 외삼촌 이야길 담담하게 해주셨다.
“태몽을 꾸었거든. 그런데 호랑이였는데 가슴으로 안겼지. 꼭 끌어안고 나중에 보니 종이호랑이였지 뭐냐. 그래서 원래 내게 태였지만 종이호랑이였기에, 태몽이 그러했기 때문에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단다. 종이호랑이였으니까.”
눈물 흘리며 외할머니가 이야기해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외할머니는 정산 댁으로 불리었는데 성함은 임산옥이었다, 부는 정산 3.1 만세운동으로 일제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러 독립유공자였고, 어머니도 손녀로 독립유공자인 셈이었다. 머리가 아주 총명하여 기억력이 좋아했고 옛날이야기를 잘 해주셨다. 화내는 모습은 본 기억이 없었다. 원래 가까이 있는 친손자들한테는 혼을 내겠지만 가끔 오는 외손자들에게는 어떻게 하면 맛있는 것을 해줄까 생각뿐이셨을 것이다.
큰아버지와 여러 가지 문제로 외가가 있는 탄천면 남산리 외갓집 바로 앞으로 이사를 왔다. 어머니도 작은 집이면서도 할머니를 모시고 큰집 일을 해주고 삼촌도 우리 집에서 사는 등 생계의 거의 전부를 도맡아 하니 어머니도 엄청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나는 의당 월곡리에 태어나 한 살이 되어 외갓집 있는 남산리 산골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온 셈이다. 처음에는 외갓집 사랑방에서 살았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아들이 있었는데 병으로 죽었다. 외숙모는 한집에 내가 있어 자신의 아들이 치여서 죽었다고 나를 엄청나게 미워했다. 임신했을 때 누굴 미워하면 그를 빼닮는다는 말처럼 외사촌 동생은 나와 형제같이 닮았다. 사랑방에서 남동생이 태어났다. 나는 어머니와 외할머니, 그리고 이모의 말씀에 의하면 열두 달 만에 태어났다. 산기가 있어 외할머니와 막내 이모가 눈이 펄펄 내리는 날, 공주에서 조치원 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데 손님이 하도 많아 금강교를 지나 전막에서 내릴 때 버스 창문을 통해 내렸다고 했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 속을 삼십 리 떨어진 월곡까지 걸어가니 산기만 있지, 낳지를 않아 삼 일 후 다시 외갓집으로 돌아갔다가 섣달에 또 산기가 있다고 해서 또 외할머니와 똑같이 걸어갔다. 내가 태어나던 날은 할머니 일 년 제삿날이여 준비하는데 해산을 하려 해 제사를 물렸다. 할머니 제사는 파제가 되고 말았다. 무술 생 정월 스무하룻날 고고의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원체 크게 태어나 난산이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극진한 산후조리임에도 일주일 동안 빈사 상태여서 병원까지 갔던 모양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