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인생 이야기 아버지와 나의 삶 (Ⅸ)
사철 난방과 취사를 전부 나무에 의존했다. 형하고 나무하러 산에 가면, 형은 지게를 지고 나는 칡넝쿨을 끈으로 멜빵을 하여 나무를 집으로 날랐다. 당시에는 산림녹화라 해서 사방공사를 하여 산이 제법 푸르러졌다. 우리 동네는 산림녹화 시범지대로 되어 면사무소 산림계 직원이 자주 순찰하였다. 나무하다 들키면 벌금을 물고 지게에 나무를 지고 가다가 산림계 직원을 만나면 지게를 벗어던지고 산으로 도망을 가야 했다. 산 중턱까지 내려와 캄캄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묘 마당에 나무를 하여 단을 만들어 지게를 눕혀 나뭇짐을 얹는다. 컴컴한 산, 묘 마당 뒤편에서 지게 끈을 던져 지게와 나무를 단단히 묶는다. 지게 끈을 던지러 가면 귀신이 있는 것 같아 계속 뒤돌아보며 지게 끈을 던진다. 묘가 갈라지며 관이 벌떡 서는 상상을 한다. 나무하러 가면 컴컴한 밤중에 지게 끈을 던질 생각에 나무하러 가면서부터 걱정이 된다. 늦게 오는 것을 알고 산림계 직원도 어디 숨어 있다가 몇 번을 맞닥뜨렸다. 혼비백산 산으로 도망가면 나뭇짐에 꽂혀 있는 낫으로 나뭇단을 이리저리 끊어 흩트려놓고, 지게는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 밟아 망가트렸다. 지게 본체는 산림계 직원이 부수어놓아서 양철과 철사로 동여매어 성한 지게는 별로 없었다. 조그만 다락논에 벼를 심어 볏짚은 초가지붕의 이엉을 엮어 귀했다. 오죽하면 십 리가 넘는 화정리 가절에서 나무를 하러 우리 동네로 오기까지 하였다. ‘어서 내려와’ 소리를 여러 번 외친 직원이 자전거를 타고 멀리 사라진다. 그러면 산 위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우리는 내려와 주섬주섬 다시 나뭇짐을 지게에 얹고 집으로 돌아왔다. 들녘은 벼농사를 지어 볏짚으로 취사와 난방을 하지만 이런 산골에는 논이 없어 볏짚을 사 이엉을 엮어 지붕을 얹을 정도로 당시 볏짚은 비쌌다. 볏짚은 새끼도 꼬고 가마니. 멍석을 만들고 양송이 재배 등 쓰임새가 아주 많았다. 산림계 직원 부모 역시 농사꾼일 테고 나무를 할 텐데 너무하다는 생각을 그 당시 어린 나이에 했다.
‘계룡산 장엄히 병풍 두르고 덕지 뜰 끝없이 펼쳐진 곳에 해방과 환호 속에 세워진 학교 이름도 좋아라. 덕지라네. 덕지 덕지 빛나는 덕지 자라나는 우리들은 대한의 새싹’으로 끝나는 덕지초등학교 교가는 아직도 새롭다. 원래 공동묘지를 평탄 작업하고 세운 학교는 학교 괴담이 만연했다. 그중 멀리 떨어진 화장실은 그 근원지였다. 학교 앞의 문방구 외엔 마을과 멀리 떨어진 학교는 특히 겨울 수업이 끝나면 어둑어둑해졌다. 고학년생들은 산 고개를 넘어 집으로 가기 때문에 일찍 끝나는 학년의 애들은 운동장이나 교실 근처에서 기다렸다 모여 같이 갔다. 그래서 그런지 학교도 음산해 보였다. 나무로 엮어 벽체를 만들고 안벽은 회벽으로 하얀색을 띠었고, 바깥면은 썩지 않도록 콜타르를 바른 송판으로 잇대어 있어, 그 틈에는 참새와 박쥐가 살았다. 어떤 때는 박쥐가 교실 안을 날아다녀 여학생들은 기겁하였다. 그때 박쥐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는데 너무 흉측한 모습에 그 이후에 박쥐는 징그러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당시 연필과 칼, 지우개는 소중했다. 부잣집 애들이나 필통을 가지고 다녔지만, 일반 애들은 연필 한 개를 책 속에 끼워서 다녔다. 손가락 마디만큼 작은 몽당연필도 못 쓰는 볼펜에 끼워 쓰고 공책도 비싸 백노지를 사 꿰매 쓸 정도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