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71회)

충남시대 2025. 5. 27. 14:07

김영삼 정부에서 공직자 재산 공개


1993. 2. 16

  밤늦게 군 출신 동창들이 습격하듯 집에 찾아왔다. 군 출신 모임이 있는데 그곳에서 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이기정 해군제독, 손덕규 공군 준장, 김성직 육군 소장, 유치노 대령, 장영명 대령, 이명남 대령, 유원구 대령, 엄수현 대령(국방대학원 교수) 그리고 이성렬 예비역 대령과 조흥은행 지점장 윤용하가 일행이었다. 그들은 내 출판기념 케잌을 사 와 촛불을 켜놓고 아내와 함께 끄도록 하고 사진을 찍어댔다.
  술을 마시는 중에 마침 내일 중국으로 귀국하는 임명옥이 와서 중국 노래와 심청전을 불렀다. 대단한 실력임을 처음 알았다. 그녀는 상해대학교 성악과를 나왔다.

1993. 2. 17

  며느리가 애기를 데려왔다. 아내와 유라가 차례로 안아주었다. 태호와 며느리는 시부모에게 애기를 안겨드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애기의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영롱한 눈망울, 잘 생긴 얼굴이다. 태호는 어릴 적에 젖을 먹지 못하고 자랐는데.....

1993. 2. 25

  14대 대통령 취임식 날이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3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식이 거행되었다. 김영삼 정부의 문민정치가 시작되었다. 총리와 감사원장은 호남 사람으로 뽑았는데 김영삼의 지침은 부정척결, 경제발전, 국가기강확립이었다.

1993. 2. 26

  예하에서 신춘문예집 출판기념식이 있었다. 김윤식교수가 픽션에 대해 강연했다. 픽션에는 로망스, 목소리(주의주장), 정보, 소설이 내포돼 있다고 했다.
  장경렬 서울대교수와 김석희가 나를 보고 반색을 하며 앞자리에 앉으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밤에는 반포에 있는 가야성(호화판 중국집)에서 동창 10여 명이 모였다. 언필칭 가장 출세한 “후원회” 멤버들이었다.

1993. 2. 27

  이유식 교수한테서 전화가 왔다. 자기가 <삶터문학>지 일을 보게 되었는데 나보고 중편 하나를 써달라고 한다. 힘들다고 하니 그럼 단편이라도 써달라며 창간호는 기념이 될 수 있으니 꼭 써달라고 한다. 지금 장편을 쓰고 있어 힘들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주간조선>에 내가 이문구 박범신 등과 함께 실렸다.

1993. 3. 2

  숙명여대 김주연 교수가 <문학사상>에 내 작품집 <늰 내 각시더>에 대한 좋은 평을 실었다. 소위 문지파의 4인방인 그가 평을 해줘 의미가 크다.

  서울신문 여성지 에 나에 대한 글이 크게 실렸다.
  지금 53세인 내 실제 나이는 43세다.  A=a-10

1993. 3. 3

  창원 고영조 시인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현대문학> 3월호에 내 작품평이 실렸다고 한다. <이 달의 책> 란으로 5페이지나 되는 많은 지면을 할애해 주었다. “있어야 할 세상 드러내기”라고 제목을 붙인 신 교수의 평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다.

1993. 3. 4

  내 『늰 내 각시더』 출간을 축하해 주겠다며 8명이 모였다. 이선(동아일보 신춘문예), 한정희, 정영희, 이원섭, 최윤진, 최일옥, 유현종 소설가였다. 유현종 씨는 <월간문학>에 내 작품 평이 나왔는데 신동화 평론가가 『늰 내 각시더』를 너무 칭찬했다고 자랑삼아 말했다.
  “신문에서 휩쓸더니 이젠 문예지에서 휩쓰네.”
  유현종 소설가의 말이다.

1993. 3. 6

  김원일이 <중앙일보>에 연재한 <늘 푸른 소나무> 9권 중 6권을 내게 주며 말했다.
  “처음 책을 냈는데 너처럼 각광받기는 처음이다. 넌 확실히 소설을 잘 써.”
  남을 칭찬한 적이 없을 만큼 거만하기로 소문난 김원일에게서 그런 칭찬을 들으니 민망스럽다. 함께 복찌개를 먹었다.

1993. 3. 7

  한국문화원 소설반 수강생들에게 특강을 해달라 해서 강의를 마치고 이야기하는 중에 어느 주부가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서 강의를 하루 도강하는데 교수가 소설의 반전기법을 설명하면서 내 작품 <그리고 말씀하시길>을 예로 들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리고 말씀하시길>을 플롯 과정의 텍스트로 활용했다고 한다. 언젠가 고려대 송 교수는 내 작품을 극찬한 적이 있었다.
  임헌영 평론가는 내 강의를 듣고 제일 감명 깊었다며 다른 여러 사람들보다 가슴에 와닿는 게 많았다고 한다.

  나는 작품에서 경찰정신을 자주정신과 서민정신이라고 묘사했는데 전자는 책임정신이고 후자는 인간주의정신이다.

  『인간의 시간』상하권 쓰기에 지쳐 있다. 애초에 정한 제목은 『파도가 쓴 일기』였다.

1993. 3. 13

  김주연 교수와 단둘이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김 선생이 좋은 작품을 썼기 때문에 평을 했고 다른 사람들도 김 선생이 잘 쓰니까 어울리죠.”

1993. 3. 18

  김남주 시인이 나오라고 해서 민족문학작가회의(회장 신경림)가 주최하는 행사장(여의도 백인여성회관)에 나갔다. 김남주는 상임이사로 이번 행사를 주관했는데 문익환 목사와 부산 미문화원 방화범 김현장의 석방 환영회를 겸한 행사였다. 국회의원 십여 명과 정무장관과 차관도 나왔다. 참으로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감남주는 또 나보고 함께 일하자고 했다.
  식이 끝나고 나는 박나연, 이경철, 이재무, 김영현 등과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

1993. 3. 20

  김치수 이화여대 교수, 김주연 숙명여대 교수, 김화영 고려대 교수, 정현기 연세대 교수, 오생근 서울대 교수, 김원일, 정문길, 김원우 등과 보신탕을 먹고 밤에는 장유에서 밴드를 동원하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간이 나빠 술을 못해 지루했다. 김원일이 내 귀에 대고 “그저 쓰는 게 장땡”이라고 속삭였다.

1993. 3. 22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뒤로 공직자 재산 공개 파문으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그의 지지율이 자그마치 94%나 된다.

  양평 서후리 집에서 2박 3일 지내다 왔다. 어서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

1993. 3. 30

  며느리가 아래층에서 밥 하는 동안 나는『인간의 시간』을 타이핑하면서 손녀딸을 책상 옆 방바닥에 뉘어놓고 보고 있다. 그놈이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치면 해뜩 웃는다. 하지만 계속 글을 쓰고 있으면 심심한지 칭얼거린다. 그래서 또 말을 걸어주면 재밌어한다. 그놈은 인쇄용지만 움직여도 짜증을 그친다. 드디어 웃음을 터뜨린다. 할 수 없이 집필을 그치고 안아주었다.

1993. 4. 2

  오늘 현대문학상 시상식(프레스센터)에 갔다가 이문열 씨와 둘이 오랜 시간 이야기했다. 그는 이수익이 사회를 보는 술좌석에서도 자꾸 내 작품에 대해 칭찬했다. 그리고 둘이 택시를 타고 탑골 술집으로 갔는데 그곳에서도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그는 <늰 내 각시더>를 읽고 10년 넘게 사귀어온 사이처럼 느껴질 만큼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며 조남현 서울대 교수, 정현기 연세대 교수, 최동호 고려대 교수와 함석 해서도 나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나를 형이라 부르겠다고 했다. 또 앞으로 내가 쓸 작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문열 작가는 모든 교수들이 듣도록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분이 돈 좀 있고 멋으로 하는 문학인 줄 알았는데 이번 작가의 말을 읽고 감명이 컸다. 그래서 소설을 쓰는구나 하고 깨달았어.”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