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73회)

충남시대 2025. 6. 10. 13:49

한국문단을 뒤흔든「작가의 말」


1993. 5. 17

  라스팔마스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마드리드로 떠날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1993. 5. 20

  나에게는 불치의 병이 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다. 빨갛고 노란 꽃이나 단풍을 고운 제 색깔로 느끼지 못하는 병, 하지만 나는 그 병을 고치려고 애써본 적이 없다. 그 병이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병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첫대목부터가 독자를 사로잡았다며 야단이다.

1993. 5. 21

  아내와 양평 서후리 집에 가서 쉬었다. 채전에 야채는 모두 심어져 있었다. 소외감이 들긴 하지만 시골에 와서 살아야겠다.
  오후에 며느리한테서 전화가 왔다. 태호가 손님과 싸웠다는 것이다. 속이 상했지만 참을 수밖에. 책을 거두어 서울로 돌아오니 성모병원 응급실에 양쪽이 모두 와 있는데 태호는 응급실을 서성거리고 한쪽은 진찰을 받고 누워 있었다. 태호의 상처도 컸다. 손가락과 팔이 물리고 입술이 터졌다. 물린 손가락에서 피가 떨어지자 쫓아나가 눈자위를 쳤는데 안경이 깨지고 다쳤다고 한다. 집에서 통근치료를 받아도 될 일을 서로 피해를 내세우려고 응급실에서 하룻밤을 샜다. 나는 아내와 새벽 3시경에야 집에 왔다.

  라스팔마스 남 장노한테서 팩스가 왔다. 반가운 편지였다.

1993. 5. 25

  세 가지 약속이 밀렸다. 그동안 못 만난 김원일의 출판기념회(늘푸른 소나무) 참석과 손덕규, 이기정, 김성직 세 장성들과의 보신탕 약속, 그리고 남부경찰서장과 과장들과의 점심 약속이 그것. 이제는 작품창작 때문에 누구와도 만나기 싫다.

1993. 5. 27

  종남스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처음 있는 일이다. 승가사에 있었는데 언제 동학사로 내려갔을까? 내일이 초파일이니 놀러 오라고 했다. 내 책을 잘 받아 읽었다고. 그 여승은 내게 소설에 취미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4일 뒤쯤 도로 승가사로 가서 공부하겠다고 한다.
  무슨 인연일까?
  그 젊은 여인은 어째서 산문에 들었을까?

1903. 5. 31

  서후리 집에서 3일 간 지내다 왔다. 동녘골에는 찔레꽃 향기가 자욱했다.
  목이 아파 이비인후과에 다녀왔다. 가습기를 틀라 한다.
  고향에 근거지를 잡을까 아니면 서울 근교에 근거지를 잡을까 망설여진다.

1993. 6. 5

  명동성당에서 이호철 소설가의 딸 결혼식이 있어 다녀왔다. 그분을 만난 지 1년이 훨씬 지났다. 동경에서 전화한 후로 내가 피해왔던 것이다. 저번에는 이흥복(문향회 회장)이 이호철 선생의 지시를 받고 꼭 나와달라고 사정했지만 나가지 않았다.

1993. 6. 12

  동녘골 집에서 나무를 심었다. 서초동 집을 헐어 건축을 하는데 마당 나무가 아까워 그 정원수를 차에 싣고 와서 태호를 데리고 인부와 심었다.

  윗집에 사는 화가 민정기 씨가 왔다 갔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늰 내 각시더>를 주고 차를 마셨다. 그는 진작 나를 보고 싶었지만 없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는 며칠 전 내가 없는 사이 화집을 들고 찾아왔다가 아내만 만나고 갔다는 것이다. 그의 화집에서 <동녘골 아침> 제하의 미술평론가의 평이 실린 그의 그림 속에는 옆집 명기 엄마를 모델로 그린 <이른 봄 무씨 부리기>가 앞면에 나와 있었다. 

  지난주에는 부여에 다녀왔는데 누나네 옆집 군청 백 과장과 사촌형이 준 소곡주를 마시는 중에 백 과장은 부여서점에서 <늰 내 각시더>를 보고 반가웠다며 고향인 충화면 유지들에게 책을 주자고 했다. 고향에 작가가 있으니 기념해얀다고 했다.

1993. 6. 13

  인천에 사는 강인봉 작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장편을 탈고했다고 한다. 그는 무척 나를 찾았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선생님만 한 작가가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기교는 연습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인간은 선생님처럼 되지 못할 겁니다.”
  강인봉의 지나친 칭송이 민망했다.
  “저는 할말은 합니다. 거짓말을 못합니다.”
  사실 아부할 그가 아니다. 지성지 <문학과 지성사>에서 시집을 냈으며 승려생활로 때 묻지 않은 그는 어눌한 말투부터가 사람됨을 나타낸다. 그는 내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종남스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공부에 깊이 빠져 있는 모양이다.

  옛날 동해안 시절에는 깨우침에 대한 목마름이 심했는데 이제는 번뇌뿐이다. 갖은 게 있어서일까? 버려야 한다. 내 몸이 어서 썩어 거름이 되고 그 거름을 먹고 자란 수목들이 꽃과 열매를 맺고......
  동녘골 쪽으로 낸 큰 창문 유리에 청개구리 한 마리가 달라붙어 기어오르고 있다. 빗방울이 튕기는 유리가 미끄럽지 않은 모양이다. 거기에 날파리 떼가 모여든다. 그것들이 내 유일한 친구들이다. 바로 창문 밖에서 꽉꽉 대는 왕머구리 소리가 집필을 방해할 정도로 소란스럽지만 싫지는 않다.

1993. 6. 14

  내 귀여운 강아지 나래가 책상 옆 카펫 위에서 혼자 몸을 뒤치다가 엎드린다. 힘이 드는지 얼굴을 요 위에 처박고 가만히 누워 있다. 나는 워드프로세서를 치다가 그놈을 안아주었다. 아까는 아내, 며느리와 함께 나래를 안고 양평 프라자 근처 패러글라이딩 장소로 갔다. 유명산에서 날기 시작하여 그곳에 착지하는데 태호도 한 달 전부터 그 위험한 스포츠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발리섬에 갔을 때 모터에 매달려 바다 위 100여 M 높이를 난 적이 있는데 그것도 무서웠는데 오늘 패러글라이딩은 수백 미터 상공을 날고 있었다.

1993. 6. 15

  아침 일찍 일어나 타이핑하는데 건넌방에서 애기 옹알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래가 혼자 깨어나 에미 애비 곁에 누워 놀고 있다. 너무 예쁘다. 사실 손녀딸이어서가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일부러 애를 보러 찾아올 만큼 잘 생긴 얼굴이다. 아내도 나래를 무척 예뻐한다. 몸을 닦아줘 키운 손녀딸이라 더욱 예쁘다고 했다. (훗날 대여섯 살 때는 어린이 상품 선전 모델로 선발되었다.)

  집필 중에 동녘골 계곡 깊숙이 산행을 했다. 향그러운 송림 내가 살갗을 녹인다. 눈으로 수목을 보고 귀로는 새소리를 듣고 코로는 송림 내를 맡고 손으로는 바위를 만진다. 하지만 신이시여 내 입만은 봉해주소서!

1993. 6. 24

  목요일. 아내가 시 공부를 하러 서울에 가는 날이다. 마침 중앙일보 이 기자와 박라연 시인이 서후리 집에 찾아왔다. 오후에 아내가 돌아오자 함께 집 앞 개울에서 보쌈으로 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술을 마셨다. 이 기자는 박라연에게 우리(그와 나)는 프롤레타리아 출신이라 시골 정경이 그립다며 양조장 딸인 박라연을 부르주아지 출신이라고 했다. 박은 아내가 동인지에 발표한 시를 아내에게 평해주며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갖췄다고 했다. 그녀는 자기의 습작품을 꼭 이 기자에게만 보여준다고 했다.
  넷이 술상 앞에서 오붓하게 이야기하는 동안 내가 아버지의 생과 초등학교 이동순 담임선생 이야기, 공군 제대 이야기, 산에서 나무하던 이야기를 하자 이 기자는 흥분까지 한다. 그걸 그대로 쓰라고도 한다. 그런 걸 후배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저번에 출간한 소설집의 작품들은 모두 신춘문예 당선작 감이라고 했다. 모두 정말 큰 작품들이고 그래서 각광을 받았다고 흥분했다. 그는 내게 이제는 개구리처럼 와글와글 거리라고 했다. 나는 내 과거를 쓰는 것이 주책 떠는 것 같다고 말했더니 “김 선생님의 과거야말로 대작을 쓰게 한 운명”이라고 했다. 박라연도 내 적나라한 모습을 본 셈이라고 감동했다. 그들은 내게 작가수업 시절을 자세히 쓰라고 했다. 그들은 저녁 때야 집을 떠났다.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