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75회)

충남시대 2025. 6. 24. 14:03

금융실명제 「돈보따리를 들고」


1993. 8. 3

  중국 여행의 백미인 리강 유람에 나섰다. 전체 강 길이가 447km 중 죽강 부두에서 양삭 부두까지 57km를 배로 유람하는데 석회암 산의 절경이 이어진다. 중국의 10대 관광지인 만리장성, 계림산수, 자금성, 항주서호, 안휘황산, 소주원림, 장강삼협, 서안 병마용, 승덕 피서산장, 대만 일월단 중에서 계림관광이 최고라고 한다. 배가 줄을 이어 강을 따라 흘러간다. 점심도 배에서 먹었다. 감탄의 연속이다.

1993. 8. 12

  오늘 저녁 8시를 기해 금륭실명제가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실시되었다. 정의사회구현의 일환으로 경제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걸 각오하고 혁명적 조치를 취하게 된 것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등 비판계층에서는 환영을 표시했다.
  3000만 원 이상의 액수를 인출 시에는 국세청에 통보가 되고 모든 금륭거래 시에 주민등록증 등 실명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제출하게 되어 있어 돈의 흐름이 투명해지기 때문에 사회에 검은돈이 숨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증권시세가 역사상 최 하락세를 기록했지만 장래는 희망적이라고 한다.

  다음은 그 당시의 사회상을 풍자한 내 소설 「돈보따리를 들고」인데 1993. 9. 12자 <중앙일보>에 특집으로 보도되었다.

「돈보따리를 들고」

  독사 대가리가 잔뜩 독을 품고 꼬나보는 형국이었다. 몇백억 몇천억 짜리 큰손만 물어뜯을 줄 알았는데 잔챙이에까지 겁을 주고 있으니 금융실명제가 꼭 살무사처럼 보였다. 순인출액이 삼천만 원만 넘어도 국세청 통보, 실명전환액이 오천만 원만 넘어도 국세청통보, 주식매각금이 삼천만 원만 넘어도 국세청 통보, 들리는 소리마다 국세청 통보고 세무조사다. 게다가 안방금고를 설치한다느니 금덩어리나 골동품을 사잰다느니 소문도 분분하다. 모든 소문이 마치 앞으로는 돈을 많이 벌지 말라는 소리 같았다. 황대구씨는 요즘 장사보다 텔레비전과 신문을 통해 실명제 뉴스를 듣는 일에 더 열중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그는 어깨춤이 절로 났었다. 실명제는 틀림없이 사돈인 박 회장의 뒤꿈치를 물어뜯을 것이었다. 독사한테 물리고 어느 큰손인들 배겨 나겠는가.
  “이제야 그 영감탱이 팔팔 뛰는 꼴을 보겠구먼.”
  황대구씨는 기분이 고소해지자 못 마시는 술까지 마시고 거나하게 취했다. 돈뭉치란 원래 활개를 치고 굴러다녀야 번식력이 강해지고 싱싱해지는 법인데,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썩어갈 박 회장의 돈뭉치를 생각하니 절로 신바람이 났던 것이다. 황대구씨에게는 경제정의실현이니, 부패요인척결 따위의 유식한 말들이 먼 산울림으로만 들렸다. 그에게는 오직 박 회장의 검은돈이 장마철에 거름 썩듯 폭싹 삭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참으로 설움 많던 세월이었다. 딸 경아가 시집간 지 5년 동안 황대구씨는 사돈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거니와 가끔 기별을 넣어도 만나주긴커녕 전화 한 통 없었다. 그러니까 이쪽 사돈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해 왔다는 말이다. 사위도 마찬가지였다. 체면에 못 이겨 명절날에야 겨우 코빼기를 비치다가 요즘에는 그나마 발길을 끊고 말았다. 사위뿐이 아니다. 시댁의 돈맛에 길든 탓인지 딸년마저 박 회장네 며느리가 된 후로는 친정아버지를 얕잡아보기 일쑤였다. 친정이 같은 서울바닥인데도 일 년에 기껏 한두 번 들를까 말까 하는 데다, 부모 앞에서 으시대는 거동부터가 아니꼬울 지경이었다. 벤츠 뒷자리에 타고 와 기사를 시켜 대문 버저를 누르는가 하면, 부모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갈음하는 꼬락서니가 아무래도 내 자식 같지가 않았다.
  “저게 내 속에서 나온 자식여? 저럴 바엔 새끼를 이쁘게 낳지 말걸. 암튼 나는 저런 꼴 못 봐!”
  황대구씨는 딸에게서 느낀 역겨움을 마누라에게 내뱉곤 했다. 딸이 못생겼더라면 아예 박 회장네 회사 비서로도 뽑히지 않았을 테고, 따라서 그 집 식구가 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늘 딸 편이었다.
  “구멍가게 이십 년에 저 영감탱이 소견머리가 밴댕이 콧구멍처럼 꾀죄죄해졌어. 수억 대 보석반지 끼고 다니는 딸자식을 자랑하진 못할망정 아니꼽게만 여겨? 그리고 그 애가 이쁘게 생긴 것도 모두 제 복이고 제 팔잔데 웬 배알이야. 귀염 받고 호강하라고 이쁘게 태어났고, 그래서 부잣집 아들 눈에 든 게 아니냐 말여. 제발 이젠 맘을 활짝 열고 살아봐요.”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 된다는 아주 평범한 논리였다. 아내는 늘 자기 팔자를 손해 보는 생으로 여겨왔다. 남한테 빠지지 않을 미모로 태어났으면서도 하필 맹추 같은 황대구씨와 짝을 맺은 탓에 코 묻은 돈만 주물러 온 팔자가 딱하기만 했다. 소시 적에 사돈영감 같은 사내를 만났던들 지금은 뭉칫돈을 주무르는 귀부인이 되었을 게 아닌가. 아내는 지금도 딸의 결혼식날을 생각하면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운동장만 한 식장을 가득 메우고도 철철 넘치는 축하객들의 인산인해! 마당과 골목을 메우다 못해 팔 차선 도로에까지 늘어섰던 고급 승용차들의 차산차해! 거기에 비해 자기네 축하객들의 후줄근한 꼬락서니가 낯 뜨거워 숨통이 막혔다. 오죽해야 결혼식을 치르지 말고 딸을 그냥 보자기에 싸가기를 바랐을까.
  “현금으로 숨길 수밖에 없어.”
  아내와 함께 실명제에 대한 텔레비 토론프로를 시청하던 황대구씨가 단안을 내렸다. 실명제 실시 이후 장사로 번 돈만 해도 팔백만 원. 거기다 적금 탄 돈 이천오백만 원을 합치면 모두 삼천삼백만 원이 넘었다. 그 돈을 은행에 넣었다가는 통장 액수가 모두 일억 원을 넘게 된다. 계좌를 아내와 아들 이름을 빌려 세 개로 쪼갠 덕에 실명전환이야 어렵지 않게 넘겼다지만 아내와 아들 계좌에는 더 이상 돈을 넣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매월 순이익이 팔구백만 원이 넘게 모아지는 데다 아무리 실명이라 해도 예금액이 탄로 나게 되면 당장 일반과세로 세액책정이 달라지고 그동안의 소득 탈루가 들통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막적으로는 판매 외형을 줄여 아직 과세특례자로 버티고는 있지만 어서 돈을 빼내어 예금고를 줄여야 될 판이었다. 더구나 신고기간이 끝나면 고액 예금자에 대한 뒷조사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 가슴이 이렇게 뛸 정도니 박 회장 가슴은 오죽할까?”
  황대구씨는 아내의 눈치를 보며 혼잣말로 이죽거렸다. 그 말은 자기 스스로 마음을 달래 보려는 자위책인 셈이었다. 자기가 열만큼 애를 태우면 박 회장은 백배나 천배로 애를 태울 거라는 그 재미로 위로를 받고 싶어 한 말이었다. 아내 역시 그 말에는 꼬투리를 달지 않았다. 탈세에 대한 걱정은 남편이나 마찬가지였다. 판매 외형 그대로 세금을 내자니 애쓴 만큼의 수입이 못될 거고, 그렇다고 세금 때문에 장사를 걷어치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나 고생하며 일으킨 업소인가. 먹을 걸 못 먹고 쓸 걸 못쓰고 동전까지 긁어모아 일으킨 사업체가 아닌가. 말이 구멍가게지 목 좋은 네거리 코너에 공산품은 물론 야채. 과일, 곡식 등 농산물에다 김밥. 오뎅 같은 간이 음식매장까지 차려져 웬만한 마트를 뺨칠 정도였다.
  “돈 버는 것도 그래요. 쉽게 버는 장사라면 세금을 에누리 없이 낸들 뭐가 억울하겠어요. 하지만 우리집 장사는 지금 벌이로도 할까 말까 하는 장사 아녜요? 밤을 새우기가 일쑤인 데다 새벽마다 야채시장을 뒤져야 되고, 아침부터 쉴 참도 없이 김밥을 말고 손님을 받아야 하니 맘 놓고 잠잘 새가 없잖아요, 남과 같이 놀 때도 없고요. 그런데도 벌이가 좋다고 세금으로 거둬가면 적게 먹고 편히 살지 뭐 하러 이 고생을 해요? 야채와 김밥장사만 집어치워도 몸이 훨씬 편할 텐데요. 매상이 반의반으로 줄 테니 세금 걱정 안 해도 좋고.”
  “딴소리 말고 돈 숨길 데나 의논하자구. 그럼 어디다 숨기면 좋겠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황대구씨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는 아내의 오기스런 말이 헛소리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매상을 줄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세금으로 왕창 뜯길 수도 없거니와 장사 포기는 더더욱 안 될 말이었다.
  “도둑이 들어와 뒤져도 들키지 않을 장소라면? 그럼 보자기에 싸서 지하실 창고에 쑤셔두죠 뭐.”
  아내가 머리를 짜냈다.
  “그건 옛말야. 요즘 도둑은 약아서 허술한 데부터 뒤진다는 거야.”
  “방 천장에 구멍을 낼까요?”
  “그것도 표가 나지.”
  “헌 이불속에 판판히 깔아서 개두면 어떨까요?”
  “만져보면 당장 알잖아.”
  “그럼 옹기에 담아 마당에 묻죠. 삼천 이백만 원이면 만 원짜리 열 다발씩 세 뭉친데 우리집 작은 옹기만하면 십상일 거예요.”
  “남들은 스덴판으로 통을 만들어 마당에 묻는다던데?”
  “스덴보다야 질그릇이 났죠. 암튼 묻는 수밖에 없어요. 우리 같은 처지에 대형금고를 들여놓을 수도 없고.”
  “그럼 그러자구. 일 년치씩 묻어두면 삼 년이면 작은 옹기로 세 개, 오 년이면 다섯 개, 그런 식으로 세월이 흐르다 보면 무슨 수가 생기겠지. 그런데 아들한테는 어떡한담?”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