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인생 이야기 아버지와 나의 삶 26회
가끔 마을 아가씨들이 놀러 왔다. 낮에는 멸치 막에서 멸치 고르고, 밤에 전마선을 타고 노 저어 왔다. 놀러 온 다음 날 낮에는 졸면서 큰 멸치와 작은 멸치 그리고 다른 종류를 선별하는 작업을 했다. 아가씨들이 올 때 김치라도 가져오면 나는 대환영이다. 한 가지 반찬을 해결하기에 밥쟁이가 불쌍해 올 때마다 김치며 나물을 준비해 왔다. 탐조등 근무는 두 개의 카본 봉을 접촉시켜 해상의 선박을 확인하는 근무인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또 발전기도 없어 근무를 서지 않는 대신에 공용화기초소에서 근무를 섰다. 이런 근무 외에 노래 사역이 있었다. 고참은 노래를 하라는 명을 내린다. 나는 아는 노래가 별로 없어 아주 힘들었다. 내가 조금 아는 노래는 느린 곡조로 그 당시 가장 유행하던 ‘밤배’ 등을 불렀다. 젓가락 장단에 맞는 흘러간 노래를 좋아하는데 그들의 입맛에 맞질 않았다. 한 번에 20곡 명을 받으면 맞으면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야 나오너라 쿵짜락쿵짝,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쿵짜락 쿵짝, 엽전 열 닷냥, 노래를 못하면 장가를 못 간다, 아 미운 사랑. 장가를 못 가면 아들을 못나요, 아 미운 사랑. 우리 동네 명가수 아무개를 소개합니다. 생긴 것은 못 생겼지만 노래하나 끝내줍니다. 하나, 둘, 셋.”
노래 한 곡을 하는데 전주곡이 이렇게 길다. 이런 전주곡도 처음 들어 배웠다. 3식 식사를 챙기는 일도 힘든데 고참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많은 사역이 있었다. 매일 밤 ‘집합’ 소리는 공포에 가까웠다. 그날그날 시정할 사항이 왜 그리도 많은지 고참은 졸병들을 괴롭혔다. 한두 차례 맞고 나야 잠을 잘 수 있었다.
10월 말 섹터 이동이 있었다. 우리 대대는 여천공단 방어 임무라서 경남 경찰국에서 남해의 2개 초소를 인수했는데, 우리 초소 외 1개 초소가 남해로 이동하였다. 남해군의 염해와 작장초소였는데 우리 초소는 작장초소였다. 해경정에 이사할 물건을 싣고 남해로 이동하였다. 706 전경대대 126 전경대가 주둔하던 초소를 우리가 인수받았다. 이동한 날은 추석 하루 전날이었다. 전임부대는 취사장의 선반 판자까지 다 가져가 휑한 상태로 나무와 판자를 주워다가 임시로 물건을 정리하였다. 추석날 휘영청 보름달이 밝았다. 추석이라 우울해 있는데 집합하라고 했다. 59기 곽 이경이 와서 나는 식사 당번은 면하여 강도 높은 근무를 하였다. 얼차려를 받다가 나를 불러 몽둥이를 가져오라고 정 상경이 말했다. 아무리 찾아도 몽둥이 할만한 것이 없어, 죽은 소나무를 발견하여 발로 밟고 손으로 가지를 쳐 몽둥이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이게 몽둥이여야. 엎져 새꺄.”
내가 해온 몽둥이로 엉덩이를 사정없이 때렸다. 하도 아파 몸을 움츠리는데 머리를 맞았다. 다시 해 오라는 말을 듣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데 현기증이 났다. 산속으로 들어가 몽둥이를 찾는다고 하다가 나는 쓰러졌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10월 해안가는 바닷바람이 불어 초겨울 날씨로 싸늘했지만, 그 당시 방한복을 입고 있어 그나마 괜찮은 것이었다. 그때까지 대원들은 날 찾아다녔는데 골짜기에서 웅크리고 있던 나를 발견한 것이다.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