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인생 이야기 아버지와 나의 삶 21회
밥을 먹고 잘 갔다 오라는 친구들의 말을 뒤로하고 이리저리 생각하며 훈련소 부근으로 택시를 탔다. 저녁 다섯 시에 훈련소로 들어갔다. 많은 훈련병과 가족이 훈련소 정문에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호객꾼이 도장이 있어야 한다고 해 막도장 하나를 파고, 나는 홀로 와서 남들의 이별 장면을 보며 유유히 정문을 통과하였다. 조교가 우리 집결지로 안내하였다. 한 명 한 명 호명하고 모두 도착할 때까지 인원 점검을 계속했다. 컴컴해질 무렵 인원 점검이 끝나고 4열 종대로 모여 조교들에 이끌려 갔다. 정수리를 계속 몽둥이로 내리치는 바람에 거의 머리에 손을 얹고 30연대에 도착했다. 30연대 조교들에 인계한 후, 인솔 조교들은 떠났다. 가자마자 원산폭격과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얼차려가 시작되었다. 송별회 등으로 기력이 쇠해지고 막 밥을 먹은 친구들은 토하기 시작했다. 두들겨 맞고 혼을 쏙 빼놓은 다음 내무반으로 인솔하였다. 지켜야 할 수칙이 왜 그리 많은지 한참을 지시하더니 11시가 넘었다며 내무반 앞번호부터 취침 당번을 정한 뒤 첫 훈련소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이튿날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시작된 훈련 첫째 날, 아침점호와 국군도수체조, 그리고 구보를 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살구색 식판에 자율배식이긴 하지만 식사량은 적었다. 오전에 군복과 군화를 지급받았다. 군화는 좀 크다고 말했다가 발에 맞추는 게 아니라 군화에 맞추라며 두들겨 맞았다. 군복을 지급과 동시에 가져온 돈도 집으로 송금한다며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침상 끝에 내놓으라고 했다. 검사해서 현금이 발견될 때는 혹독한 얼차려가 있다고 협박했다. 배급받은 하얀 팬츠만 입은 후 주섬주섬 돈을 내놓았다. 나는 군대에서는 돈이 필요 없다고 해서 얼마 가져오지 않았고 훈련소 들어오기 전에 배부르게 먹고 써서 돈이 없었다. 친구들은 만 원짜리 돈을 똘똘 말아 팬티 고무줄 속으로 집어넣는 등 숨기는 데 혈안이 되었다. 사복은 집으로 부친다며 종이를 줘, 집 주소를 쓰고 침상 앞으로 놓는데 괜스레 눈물이 났다. 예민한 성격인 나는 일주일 동안 변을 보지 못했다. 운동량은 많았고 먹는 것은 적었고, 특히 편안하게 있어야 할 화장실은 똑똑 노크 소리에 나오려던 변은 직장으로 들어갔다. 변을 보지 못한 나는 걱정이 되었지만 열흘 되는 날부터 정상적인 변을 보게 되었다. 열흘이 넘어 PX 가는 것을 허락했다. 팬티 고무줄에 잘 끼워놓은 돈으로 맘껏 PX를 가지만, 나는 돈이 없어 내무반에서 웅크리고 있기만 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영화관에 가 영화도 볼 수 있었다. 미리 가서 자리 앉아 있으면 훈련소 기간병들이 빡빡머리인 훈련병을 머리를 쥐어박으며 일어나라고 했다. 5분간 휴식 시간에는 우리 동기생 중 명가수는 노래 사역에 시달렸다. 혜은이의 ‘제3한강교’와 조영남이 불렀던 ‘제비’라는 노래였는데 정말 잘 불렀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 합창을 하였다.
거의 훈련을 마칠 무렵 야간 훈련이 있었다. 낮엔 낮대로 훈련을 받고는 저녁 5시에 집합하여 얼굴에 나뭇잎을 태워 얼굴에 재를 발랐다. 조교가 위장검사를 해 위장을 잘못했다며 여럿이 따귀를 맞았다. 야간 정숙 보행이며 고지훈련 등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거의 날이 샐 무렵 훈련은 끝이 났다. 동기들이 쉬면서 한 마디씩 했다.
“아들 낳으면 엎어 놓을 거야. 이런 혹독한 훈련은 내 생애로 끝나야 해.”
이구동성 같은 목소리였다. 얼마나 힘들면 이런 말을 했을까. 첫아들 낳았을 땐 야간 훈련 때 한 이야기를 까맣게 잊었지만, 일만 촉광의 빛나는 이등병 계급장을 어깨와 모자에 붙였다. 30연대 훈련을 마치고 우린 27연대로 후반기 교육에 들어갔다. 후반기 교육은 분대훈련 및 구형 기관총인 LMG 30과 AR 자동소총 훈련이었다. 전반기는 M16 소총이었지만 후반기는 구닥다리인 카빈총을 어깨에 메고 탄약수인 나는 탄통을 양손에 들고뛰며 훈련을 하였다.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