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인생 이야기 아버지와 나의 삶 (Ⅹ)
절약이 아니라 가난을 이겨내 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미술 시간에도 크레파스는 30원이고 크레이용은 10원이었다. 부잣집 애들은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갖고 다니고 가난한 집 애들은 크레용과 문방구에서 낱장을 사 와 그림을 그렸다.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은 선으로 문지르면 번져 음영의 효과가 뚜렷한 반면, 크레이용으로 그린 그림은 지금의 색연필처럼 딱딱해 그림을 보면 확실하게 차이가 났다. 대체로 돈 있는 집 애들 그림이 교실 뒤편 작품란에 전시되었다. 교실 안은 2인 1조의 책상과 걸상으로 남학생과 여학생이 따로 앉았다. 남녀학생이 함께 앉는 경우는 전학을 와 자리가 안 날 때, 남녀학생을 같이 앉혔다. 아니면 말썽꾸러기 남학생을 함께 앉혀 조심하도록 하는 일종의 벌이었다. 교실 모서리 마룻바닥에는 청소도구함이 있었다. 마루판을 열고 거미줄을 헤치고 기어 다니며 연필과 칼, 지우개를 주웠다. 예쁜 여학생이 마룻바닥의 옹이로 교실 바닥 밑으로 들어가면 남학생들은 도구함의 마루판을 열고 들어가 주어 오는 호기를 부렸다. 기어들어 가면 옹이구멍으로 하얀빛이 일직선으로 들어온다. 그 빛 주위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들은 손의 촉감을 이용해 주워왔다. 한 번은 허옇게 보여 멀리 손을 뻗어 주어 보니 사람 손목뼈 같아 얼른 버리고 그다음부턴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저학년 때는 봄 소풍으로 안영리에 있는 금반산으로 갔다. 걸어서 삼십여 분이니 가볍게 갔다 올만했다. 고학년은 노성면 병사리 노성산으로 소풍 갔다. 당시 소풍을 갈 때면 5원, 많게는 10원을 가져갔다. 은색 거북선이 그려진 50환이라고 쓴 동전은 화폐개혁을 하여 5원으로, 10환의 동전은 1원으로 통용되었었다. 적은 돈 같지만 그 당시에는 장난감이나 먹을 것을 살 정도였다. 소풍 때, 선생님들은 자전거를 타고 갔지만 우린 30리가 넘는 먼 길을 걸어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소풍, 드디어 병사리 저수지가 보이면 다 온 것이다. 저수지 밑으로 걸어갈 때는 무너지면 어쩌나 두려웠다. 커다란 용이 꿈틀대다가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저수지 밑 방앗간 처녀가 이무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 병사리 저수지 밑을 지나갈 때면 온몸이 오싹해져 얼른 뛰어가 저수지 뚝방을 벗어났다. 노성산 기슭에 있는 파평윤 씨 묘소는 널찍하고 커다란 소나무가 있어 놀기에 아주 적합했다. 고목의 표피와 묘지의 비석 밑에 보물을 숨겨놓았다. 반별로 술래잡기하고 가져온 도시락을 먹었다. 점심 후에는 보물찾기 시간이라 이리저리 보물을 찾아다녔다. 도시락은 한 해에 한 번 어머니가 싸주는 김밥이다. 다른 친구들 김밥은 요즘의 김밥처럼 한입에 쏙 들어갈 정도로 가늘고, 또 칼로 썰어 짧았지만, 어머니는 굵고 길었다. 보리밥으로는 김밥을 쌀 수가 없어 이날만큼은 쌀밥으로 만든 김밥을 먹는 유일한 날이기도 했다. 그만큼 설레기도 하는 그런 날이었다. 굵은소금으로 간을 하고 오직 단무지 하나만 들어간 김밥이었지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여학생이 한 명이 있어 집으로 오는 길이 다른 길이어서 그녀의 뒷모습으로 보며 한참을 돌아온 기억에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