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 자서전

이상헌의 인생 이야기 아버지와 나의 삶 (ⅩⅥ)

충남시대 2025. 3. 25. 15:45

중학교 3학년인 1973년은 격동의 한 해였다. 73년 10월 7일 중동전쟁으로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28차 유엔총회에서는 동·서독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다. 석유배급이 시작되고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겨울방학도 조기에 이루어졌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은 74년 1월 28일이고 면접시험은 그다음 날 29일이었다. 입학시험이 지금에 비하면 매우 늦은 셈이다. 중학교 졸업식은 74년 1월 12일이었는데, 공주·부여 간 도로포장이 막 끝나 아스콘 냄새가 신선하게 코를 자극했다. 공주고등학교 원서 접수 현황은 600명 모집에 1,400명, 경쟁률이 2.3:1이었다. 지원한 중학교 숫자는 121개교, 멀리 삼례중학교에서까지 왔다. 삼례중학교에서 온 친구는 나중에 같은 반이기도 했다. 시험을 본 날,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 나오셨다. 시험을 끝내고 교문을 나오자 수고했다며 손을 잡아주었다. 공주에 사시는 생물 김용태, 물상을 가르치신 배병술 두 분 선생님이었다. 그리곤 우릴 호서극장 부근에 있는 비원이란 다방에 데리고 가 커피 한 잔을 사주었다. 처음으로 다방이란 데를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씁쓰름한 커피 맛은 별로였다. 29일 면접에서는 장래 희망과 부모님 직업, 건강 상태를 확인했다. 1월 28일은 동생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날이다. 누이와 형의 도움으로 6년 졸업의 영광을 얻었다. 덕지초등학교 25회 졸업식 날, 동생은 교육감상부터 우등상 뭐 상은 거의 다 받았다. 소아마비 불편한 몸이지만 편견, 멸시 등 어려움을 극복하고 졸업을 하였다. 나는 이미 중학교를 졸업하여 동생 졸업식에 가서 축하해 줬다. 아버지와 나, 동생 담임인 명년식 선생님과 졸업기념사진을 찍었다. 오는 길에 윗길 풀빵집에서 풀빵 50원어치를 사 먹었다. 10원에 풀빵 6개, 50원이면 30개였다. 나와 외사촌 동생 중현이와 배부르게 먹었다. 아버지는 동생을 위해 어린이용 자전거를 사주셨다. 소아마비지만 자전거 페달을 밟아 다리근육을 튼튼히 하여 탄천중학교를 혼자서 다니도록 하는 배려였다.


고등학교 시절

이제 고등학교는 공주로 가야 하는데 가난해 하숙은 하지 못하고 자취를 해야 할 판이다. 탄천에서 공주까지는 오십 리 정도라 통학은 어려웠다. 공주 사는 큰누이가 누이 집 가까운 곳 허름한 방을 얻어줬다. 3·1절을 마치고 3월 3일 일요일 아침 드디어 공주로 출발하였다. 어머니는 쌀과 감치 옷, 식기 등을 준비하셨다. 옥룡동 자취방에 들러 남산 사는 영호가 강 건넛집에서 하숙하다가 나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리어카를 빌려 금강 다리를 건너 영호의 짐을 싣고 왔다. 3년간의 고교 시절 자취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침이면 양동이 두 개를 들고 공동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처음으로 연탄 갈기 등 시련은 시작되었다. 교복과 교련복, 그리고 체육복을 맞췄다. 첫 등교일은 입학식인 3월 5일이었다. 웅장한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매의 눈을 한, 기율부 선배들이 늘어서 있었다. 교복의 후크(hook)를 걸지 않은 애들과 모자를 좀 삐딱하게 썼다며 교문 구석으로 끌고 구타를 시작했다. 첫날부터 군기를 잡으려는 기율부의 활동이었다. ‘협화단결, 성실근면, 창의 개발’이라는 교훈탑이 자부심을 갖게 하였다. 강당에서 입학식을 하였는데 커다란 규모의 강당에 놀랐다. 강당 벽에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 옳지 않은 것은 이치를 이길 수 없고, 이치는 법을 이길 수 없고, 법은 권력을 이길 수 없고, 권력은 하늘(민심)을 이길 수 없다, 한비자) 이란 글귀, 김종필 당시 총리의 서예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액자의 뜻도 모른 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반과 10반은 특수반이라 해서 서로 들어가려고 했다. 다행히 1학년 10반이 되었고 반장 선거에서 성적이 우수한 열 명을 불러줬는데 거기에 끼었지만 반장은 키가 큰 정안중학교 출신 친구가 반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