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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61회)

머리를 깎으려고 승가사로 떠난 아내1991. 8. 1  크고 아름답다는 문자의 돈황시(敦煌市). 황토사막 한 복판에 오아시스처럼 고여 있는 건조한 도시. 나는 침대머리에 앉아 아침을 맞았다. 방금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8시가 가까운데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내 옆에 누었던 룸메이트 윤후명 소설가(내 용고 후배. 16회)는 늦잠에 빠져 있다. 술 탓이다. 지난밤에는 10시경에야 어스름이 끼어들었다. 시차를 두지 않은 행정상의 잘못이리라.1991. 8. 2  아침을 먹고 막고굴(莫高窟)로 향했다. 기원전 전한 시대 불교 유물부터 당나라 후기까지 불교 유물이 시대별로 암벽에 조각된 천불동(千佛洞)이 장엄하다.  오후에는 시내 관광을 마치고 산이 울린다는 명사산(鳴沙山)을 올랐다. 모래는 메말랐지만 모래..

연재소설 2025.03.04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60회)

괴테하우스 관람과 변증법(正·反·合)  독일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은 프랑크푸르트는 라인 강의 지류인 마인 강 연안에 위치해 있으며 유럽 연합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의 하나이다. 베를린이 행정 수도라면 프랑크푸르트는 경제 수도로 인식될 만큼 금융과 상업이 발달하여 영국 런던과 함께 유럽의 금융 중심지 역할을 담당한다. 증권거래소를 비롯해 유럽중앙은행 본부와 세계 수백 개의 금융기관이 밀집한 국제금융의 메카답게 신도심의 고층건물들이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프랑크푸르트가 ‘괴테의 고향’이라는 사실이 더욱 육중한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데, 그 문화적 이미지는 경제 수도라는 역동적인 이미지와 조화를 이루어 프랑크푸르트를 가장 이상적인 도시로 채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과 ..

연재소설 2025.02.25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59회)

행사 때문에 귀가한 착한 아내1991. 6. 3   영채와 천마산에까지 드라이브했다. 새로 구입한 그랜저 승차감이 고급차답게 묵중하다. 천마산 기슭에서 함께 보내다가 새벽 2시경에야 영체네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내가 영채네 대문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차로 달려왔다. 셋이 정면으로 맞닥뜨린 셈이다. 나는 우선 영채를 집안으로 돌려보내고 수니를 타일렀다. 1시간가량 설득시켜 집으로 데려왔다. 나는 아내에게 한번 자유롭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수니는 배신을 당했다고 하지만 나는 오해라고 설득했다. 사실 나는 영채보다 수니를 택하고 싶었다. 1991. 6. 4   수니가 집을 나갔다. 보고 싶다. 방이나 뜰과 모든 공간이 수니의 환영뿐이다. 23년 간 살아온 세월의 때만은 아닌 듯싶다. 나는 그녀를 사랑해 왔..

연재소설 2025.02.18

[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58회)

토스카의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1991. 5. 11   연애시절에 수니에게서 들었던 ‘백일장 당선’이란 말이 떠올라 나는 아내에게 詩를 공부하라고 권유했다. 그러겠다고 한다.   “나를 소유하지 말아줘. 그렇게 나를 포기함으로써 위대한 아내가 되어줘.”   수니는 내 말을 이해한 모양인지 내가 구상 중인 장편소설의 인물을 빗대면서 이런 말을 했다.   “결국 나와 영채를 자기가 가지고 놀았구먼.”   섬뜩한 말이었다. 영채와의 관계를 작품창작의 모티브로 인식한 그 말이 감동스러워 수니의 손을 잡고 춤추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우리 마누라는 역시 천재야!”   저녁 때 김원일 소설가한테서 전화가 왔다. 왜 소식이 없느냐고 한다. 차마 연애 핑계를 댈 수는 없었다. 신사동 고선에서 만나 양주를 들고 ..

연재소설 2025.02.11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57회)

성지순례에서 만난 미모의 톱 탤런트1991. 5. 1   드디어 성지순례 여행이 시작되었다. 안영채가 처음 내게 접근한 것은 이집트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그동안 나는 안영채를 피해왔다. 여행지마다에서 식사를 할 때나, 사진을 찍을 때나, 밤에 자유시간을 보낼 때도 일행 모두가 안영채를 중심으로 모였지만 고고한 문인의 위상에 함몰된 나는 그런 짓이 싫었다. 그래서 일행과 겉돌았고 일부러 영채를 기피했다. 단체사진을 찍을 때도 맨 뒷줄에 서서 찍곤 했다. 그런데 멤논의 거상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을 때였다. 맨 앞줄 중앙에 모셔져야 할 영채가 어느새 맨 뒷줄 내 곁에 서 있었다. 내가 얼른 자리를 비키려 하자 그녀는 내 팔을 잡으며 “그냥 여기서 찍으시죠.” 하고 말을 걸었다. 그때부터 나는 입이 열리기 시..

연재소설 2025.02.04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56회)

퍼즈에서 일본 청춘 한쌍의 멋진 자살1991. 1. 2      나는 왜 소설가가 되었나?   나는 신(神)이 되고 싶었다. 내 나름의 종교를 만들고 싶어 소설을 택했다. 그래서 문학을 일반종교보다 상위(上位) 개념에 놓고 살아왔다. 소설창작을 신의 창조행위로 여겨왔던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일반종교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유한성의 한계'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진작 종교를 갖고 싶었지만 종교를 갖는 순간 내 문학정신이 규범화(規範化)되어 굳어질까 두려웠다. 그러니 내가 만들고 싶어 한 내 종교는 일반종교가 아닌 다른 무엇일 것이었다. 새로운 교리, 새로운 신자, 새로운 사물, 새로운 세계, 그게 내 소설이 되어야 한다. 1991. 1. 3   결국 성지순례가 취소되었다. 전쟁 때문에 신분보장을 할 수 없다..

연재소설 2025.01.21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55회)

한국문단을 뒤흔든 내 단편 「그리고 말씀하시길」 1990. 8. 22   한국문협 미주 행사 초청으로 모래 미국으로 떠난다. 가기 싫은데 끌려가다시피 했다. 하지만 미국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할 수 있어 보람된 여행이었다. 모하비사막, 그랜드캐년, 요세미티 공원을 살펴보았다. 아주 실속 있는 여행이었다.   내 룸메이트는「영자의 전성시대」를 쓴 소설가 조선작이었다. 그는 공교롭게도 내 부산중학 친구 김영하(중앙일보 논설위원)와도 친구 사이였다.「영자의 전성시대」는 명작인데도 영화로 제작되어 대중화되는 바람에 작품의 순수성이 훼손되었다. 심지어 술집에서는 술꾼들이 젓가락으로 장단을 치며 “영자의 빤스”라고 외칠 정도였다.   “김 선생님 작품은 절대 영화제작을 허락하지 말아요.”   그 말에 나는 훗날『능수..

연재소설 2025.01.14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54회)

동해안 아버지와 고향 어머니의 한 맺힌 합장1989. 8. 25   중국이 개방되기 전 ‘죽(竹)의 장막’일 때. 8월 10일부터 8월 23일까지 또 13일 동안 중국을 다녀왔다. 여행경비는 백두산 코스 40만 원을 포함하여 310만 원이고 코스는 김포국제공항에서 홍콩 – 항주 – 서호 – 상해(임시정부, 홍구공원, 이화원, 조차구역) – 장춘 – 길림 – 장백산(백두산천지에 태극기 꽂기) - 장춘 – 북경 – 만리장성 – 명 십삼릉 – 자금성 – 천안문광장 – 인민대회의당 – 모택동기념관 – 북경백화점과 시내관광 – 계림(독수봉) – 광주 – 열차편으로 홍콩 – 대한항공편으로 서울에 도착.   중국은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을 주석으로 삼은 사회주의 국가로 건국되었다. 중국의 행정구역은 23개 성..

연재소설 2025.01.07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53회)

「에미가비」1989. 4. 22   오늘부터 5월 11일까지 가기 힘든 소련(러시아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헝가리, 유고를 여행했다. 소련은 생필품이 부족한 나라여서 선물용으로 볼펜이나 연필 같은 학용품과 T셔츠, 팬티, 브래지어 등을 준비했다. 특히 소련에서는 영국담배 말보르를 선호한다는 말을 듣고 3박스나 준비했는데 정말 공항 검색대에서 담배 2갑을 주니 친절한 서비스를 받았다.   여행 코스는 동경 – 모스크바 – 우주베키스탄 타쉬켄트 – 레닌그라드(페테스부르크) – 부다페스트 –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 – 베오그라드 공항– 코펜하겐 – 암스텔담 – 마스트릿치 – 브뤼셀 – 파리 – 런던 – 서울 순이었다.   우주베키스탄 수도 타쉬켄트에서는 시장 상인중에서..

연재소설 2025.01.02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52회)

MBC TV  춘천옥에서 수개월간 촬영1987. 2. 2   오 장엄함이여! 신의 현묘함이여! 곱게곱게 짙푸른 북극하늘이여! 구름바다 위에는 오렌지색 노을이 번져 간다. 그냥 뛰어내려 영원한 감미로움 속에 묻히고 싶다. 허허한 공간 속에 어둠이 밀려오고 있다. 북극의 밤이다. 아아 나는 왜 먼 곳만을 좋아할까? 비행기는 어둠 쪽으로 향하고 노을은 그 뒤를 따른다. 아니, 저건 빙하인지도 모른다. 8시간 비행의 중간쯤이면 북극권일 수도 있다. 스튜어디스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묻고 싶은데 위치란 낱말을 몰라 지도를 펴 보이며, Where is this point now? 하고 물어보았다. 일본인 여자 스튜어디스가 손가락으로 그린란드 쪽을 짚어준다. 드디어 어스름 속에 산맥이 나타난다. 험한 산협이다. 1987..

연재소설 2025.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