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연작, 결핍이 새로운 회화의 언어가 되다 서른여덟 무렵, 나는 도시에서 붙들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서산 지곡면 닻개로 들어갔다. 나는 캔버스와 유화물감으로 작업해 온 서양화가였다. 유화는 한두 색만으로 그릴 수 없다. 여러 색의 튜브와 물감을 풀고 말리는 기름, 붓과 캔버스가 필요하다. 당시 내가 주로 사용하던 전문가용 유화물감은 수입품이어서 색 하나를 보충하는 일도 부담이었다. 수행자처럼 살아 보겠다고 택한 길이었지만 현실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산에 둘러싸인 북향집에는 사람도 자동차 소리도 드물었다. 열 해 가운데 절반은 춥고 배고팠고, 처음 몇 해는 이런 기본 재료조차 살 돈이 없었다. 그림은 그리고 싶은데 손에 쥔 재료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그러던 어느 날 문방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