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하우스 관람과 변증법(正·反·合)
독일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은 프랑크푸르트는 라인 강의 지류인 마인 강 연안에 위치해 있으며 유럽 연합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의 하나이다. 베를린이 행정 수도라면 프랑크푸르트는 경제 수도로 인식될 만큼 금융과 상업이 발달하여 영국 런던과 함께 유럽의 금융 중심지 역할을 담당한다. 증권거래소를 비롯해 유럽중앙은행 본부와 세계 수백 개의 금융기관이 밀집한 국제금융의 메카답게 신도심의 고층건물들이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프랑크푸르트가 ‘괴테의 고향’이라는 사실이 더욱 육중한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데, 그 문화적 이미지는 경제 수도라는 역동적인 이미지와 조화를 이루어 프랑크푸르트를 가장 이상적인 도시로 채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과 경제라는 아주 이질적인 소재를 조화시킨 예술품이랄까? 그런 혼성모방(混成模倣) 같은 조화를 강조하려는 듯 뢰머광장 근처에 위치한 괴테공원에는 유럽통합을 상징하는 유로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괴테박물관, 괴테공원, 괴테동상 괴테대학교 등 문호 괴테를 독일지성의 상징으로 내세우려는 독일사회가 그런 조형물을 허용하고 있다는 데에 놀라움보다 오히려 낯선 의도성을 엿보게 한다.
유럽통합과 괴테정신?
만약 그렇다면 괴테를 순수 문인 이상의 어떤 신화적인 상관물로 설정한 게 아닐까? 영국에는 셰익스피어가 있고 이탈리아에는 단테가 있으며 그리스에는 호메로스가 있잖은가. 그들은 모두 문인 차원을 넘어 신화적인 존재로 승화되었잖은가!
생각이 꼬리를 무는 동안 내 발길은 어느새 괴테하우스 입구로 다가섰다. 괴테가 태어나 여동생 코넬리아와 함께 성장했고, 그가 26세 때 바이마르 공국의 초청을 받아 떠날 때까지 창작에 몰두했던 생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전파되어 4년여에 걸친 복구 작업으로 제 모습을 되찾았다. '프랑크푸르트 시민의 위대한 아들'이라고 사랑을 받았기에 파괴된 돌 하나하나에 번호를 매겨 쌓을 정도로 원형 보존에 심혈을 기울인 복구였다.
접수대를 통과하여 생가로 들어서니 모든 시설이 낯설어 보인다. 집기가 진열된 1층 부엌 위치는 물론 중세 악기들이 전시된 2층 방들도 어디가 ‘음악의 방’이고 어디가 ‘북경의 방’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3층 괴테가 태어났다는 방도 처음 보는 것만 같다. 다만 괴테가『파우스트』1편과『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집필한 4층 방만은 낯익어 보이는데 책상과 그 앞에 놓인 의자가 무척 정답게 느껴졌다. 23년 전 나는 그 의자에 앉아 괴테의 집필 모습을 연상하다가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대화 한 토막을 속으로 읊었던 것이다.
파우스트 “자넨 대체 누구인가?”
메피스토펠레스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해 내는 힘의 일부분이죠.”
예전에는 그만큼 관람이 자유롭고 소박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지만, 얼굴이 후덕하게 생긴 독일인 남자 안내원이 나에게 손짓으로 의자에 앉아보라고 했던 것이다. 엄숙한 관람 분위기를 흔들고 싶어 한 그 안내원의 악마적(?)인 장난기가 지금 생각하면 그냥 장난기만은 아닌 듯싶다. 그가 괴테하우스의 직원이니 틀림없이 『파우스트』는 읽었을 테고, 거기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유머감각을 체득했을 것이다.
유머는 삶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제대로 구사될 수 있다. 한마디로 신의 전지적 능력에 가까울 정도로 세상 이치를 꿰뚫을 수 있어야 빛나는 유머를 구사할 수 있다. 인간이 인식한 합리성만으로는 더 진실된 모습을 볼 수 없게 한다. 유머와 기지에 능한 메피스토펠레스는 신에게서 버림받지 않은 마성적 존재로서, 토마스 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창의적 성격을 띤’ 존재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흉악한 악마의 상징적 존재가 아니라 생의 다른 이면(異面)을 냉철하게 관찰하는 존재로서 바로 괴테 자신인 셈이다. 요컨대 파우스트의 자연신론적(自然神論的) 창조력이나 메피스토펠레스가 주장하는 니힐리즘도 괴테 자신의 속성에서 우러나온 괴테의 양면성이며, 그 역설적 이율배반이야 말로 인생의 참진리를 규명하려는 괴테 특유의 변증법적 조화 기법인 것이다. 일관된 합리성(정숙한 관람 즉 正)만으로는 총체적 파악이 불가능하므로 반동적인 모순(의자에 앉힘 즉 反)을 개입시켜 괴테를 온전히 느끼게 하려는 그 탁월한 안내자 덕택에 나는 괴테와 더욱 친숙해졌고(合), 그 바람에 괴테하우스를 다시 찾게 된 것이다.
*
나는 수니를 범녀(凡女)라고 부른다. 범녀는 요즘 절에도 열심히 나가고 시도 열심히 공부한다. 나는 범녀에게 나를 구속하지 말고, 내 광기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범녀에게 제행무상을 말하며 웃기도 했다.
마음에서 영채를 잊고 나니 이처럼 평화로울 수가 없다. 나는 영채가 문둥병자를 만지기 전에는 만나지 않을 것이다.
1991. 7. 19
전규태 교수한테서 전화가 와서 나가보니 문단의 제도권 책임자가 모두 모였다. 국제PEN클럽 차기 회장 장덕수, 한국문인협회 차기 회장 황명, 서울대 교수 구인환 평론가, 한국가톨릭 문인회 회장 홍성유 소설가와 함께 불광동에서 술을 마셨다. 옛날의 전숙희 회장 선거 비화가 나오기도 했다. 나는 그들에게, 앞으로 문협은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이북에서도 유엔 동시가입을 허용할 참이라는데 민작(민족문학작가회의)과 화합하라고 주장했다.
1991, 7. 19
아침 9시 반. 거실 전화에서 벨이 울렸다. 영채는 내 글을 자기의 책에 싣겠다고 했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집 앞으로 마중 나온 영채를 차에 태우고 카페 아미가로 가서 미리 준비한 치욕적인 메모지를 내보였다. 10가지 종목이었다. 그중에는 “당신은 끼는 있되 진실이 없다.”는 항목과 “사랑은 아름답고 아늑하고 창조적이어야 한다.”는 항목도 있었다. 그녀는 “꼭 사랑에 불이 붙으려고 하면 이렇게 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내 충고가 “가족 같은 느낌”이라고도 했다.
그녀가 가여웠다. 하루하루 얼굴이 말라갔다. 그녀는 고통스럽다고 했다. 헤어질 때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다. 그녀는 내게 그림 한 장을 주겠다고 했다. 그녀로서는 대통령한테서도, 재벌한테서도 당하지 못할 수모를 내게서 당했다고 한다. 그녀는 불구자와 결혼하겠다고 한다. 그 말이 고마워 껴안아주었다. 그녀는 항상 감동을 느껴야 하는 존재다.
*
영채의 광기는 내 육신과 정신을 내가 소망해 온 색다른 차원으로 형질변경시킬지 모른다. 새로운 진리를 캐낼 수 있고 낯선 사랑에 함몰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부여할 수 있는 영채의 광기! 왜 그 낯선 차원의 세계를 욕망했으면서도 왜 그 세계를 두려워할까? 정말이지 모든 것 다 포기하고 영채의 품 안에 파묻히고도 싶다. 다만 수니가 가여울 뿐이다. 그 연민과 편안함에 함몰된 탓일까? 아니면 온갖 고난을 겪어온 착한 여자여서 옹호할 수밖에 없는 내 도덕규범 탓일까? 그게 아니면 영채가 내 본질인 고통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탓일까?
1991. 7. 23
15일간의 중국여행이다. 코스는 일본 후쿠오까 – 상해 – 장춘 – 연길(두만강, 백두산, 장백폭포) – 용정 – 북경(만리장성, 13황제 릉) – 서안(진시황 병마용, 화청지) – 란주(백탑산, 황하의 중산교, 감숙성박물관) – 돈황(막고굴, 명사산, 월야천) - 상해(임시정부 청사) - 소주(한산사, 졸정원) - 항주(서호 10경, 서시와 양귀비) – 상해공항 – 동경 – 서울.
1991. 7. 25
연길에서 이도백하에 있는 장백호텔까지 경찰차가 우리 일행이 탄 버스 3대를 선두에서 안내했다. 대단한 예우였다.
두 번째 와보는 백두산(장백산). 나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무엇을 생각했던가.
1991. 7. 30
오전 내내 만리장성과 13항제 릉을 관람하고 오후 늦게야 북경공항으로 향했다.
비가 내리는 북경 거리를 바라본다. 차가 뜸한 8차선 도로와 자전거도로, 사람이 다니는 넓은 보도, 그리고 길 건너 13층 아파트와 도로변을 따라 조경된 정원수가 함초롬히 젖어 있는 지금 경륜호텔 12층 65호실 창가 테이블 가에 앉아 일기를 쓰고 있다. 신흥국가로 발돋움하는 사회주의 국가 한 복판에서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아주 소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느끼던 바로 그것이다. 명지대 유 교수가 내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는다. 인솔자인 조병화 시인이 유독 나를 곁에 앉히고 친절을 베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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