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의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
1991. 5. 11
연애시절에 수니에게서 들었던 ‘백일장 당선’이란 말이 떠올라 나는 아내에게 詩를 공부하라고 권유했다. 그러겠다고 한다.
“나를 소유하지 말아줘. 그렇게 나를 포기함으로써 위대한 아내가 되어줘.”
수니는 내 말을 이해한 모양인지 내가 구상 중인 장편소설의 인물을 빗대면서 이런 말을 했다.
“결국 나와 영채를 자기가 가지고 놀았구먼.”
섬뜩한 말이었다. 영채와의 관계를 작품창작의 모티브로 인식한 그 말이 감동스러워 수니의 손을 잡고 춤추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우리 마누라는 역시 천재야!”
저녁 때 김원일 소설가한테서 전화가 왔다. 왜 소식이 없느냐고 한다. 차마 연애 핑계를 댈 수는 없었다. 신사동 고선에서 만나 양주를 들고 헤어졌다.
1991. 5. 12
영채가 나를 불러냈다. 나는 새로 구입한 그렌저를 몰고 카페 <아미가>로 가서 단편 「팔라니트」에 대한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가 질 때까지 작품얘기를 나누다가 서울대 교내 뒷동산으로 차를 몰았다. 숲 속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영채의 노래를 들었다. 그녀의 노래 솜씨가 보통 아니다. 슬픈 목소리였다.
1991. 5. 13
무서운 암흑이 몰려오고 있다. 나는 신앙(고통)을 잃을지도 모른다. 영채를 “귀엽고, 아름답고, 탐욕스러운 뱀”이라고 불렀더니 그녀가 “섹시하고”라고 말을 보탠다. 이집트에서 버스를 타고 평원을 달릴 때 그녀는 아랍어 간판글씨를 보고 뱀이 우글거린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1991. 5. 14
영채가 출연하는 KBS TV 녹화장에 끌려갔다. 영채는 내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스튜디오에 가서 그녀의 연기를 지켜보았다. 그녀의 숙달된 연기가 돋보였다. 그녀는 연기자들을 “기능공”이라고 부르면서 자기가 주연으로 나온 연속극 <아씨>에 대한 연기 이야기를 꺼냈다.
휴게시간에는 분장실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울 앞에서 눈자위를 손질하는 숙련된 모습이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인간은 무슨 일에든 열중할 때가 아름답다.
영채는 나처럼 죽음의식이 강한 여자다. 그녀는 이런 말도 했다.
“위장병이 암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나는 이렇게 받았다.
“그것은 나르시시즘의 구성요소가 와해될 때 일어나는 갈등이지. 곧 매너리즘 상태로 함몰될 때 탐익 되는 과정에서의 심리 노출이랄까.”
영채의 그런 자기 파괴를 신앙이 지탱해주고 있었다.
가나화랑에서 발간하는 미술지 <가나아트>를 읽었다. 영채가 파리에 있는 남동생 안종대 화백의 글이 실려 있어 준 책이다. 안 화백은 글도 잘 쓴다. 그는 내 단편 「그리고 말씀하시길」을 읽고 누나에게 “그런 분과 사귀세요.” 했다고 영채가 말한 적이 있었다.
1991. 5. 15
KBS 분장실에서, 영채는 거울 앞에 앉아 뒤에 앉아 있는 내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드레스가 움푹 푹 패인 그녀는 뒤로 팔을 뻗어 내 손을 꼭 잡으며 “당신을 보관한다”고 말했다.
녹화를 끝내고 효령능 근처에 있는 소갈비집으로 갔다. 그런데 손님들의 눈이 영채에게 쏠린 데다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들이 메뉴설명보다 먼저 그녀에게 사인을 요청했다.
“나보다 이 분이 더 유명한 분이세요.”
영채는 그런 말로 내 체면을 세워주었다.
1991. 5. 19
영채네 집에 들렀다가 그녀가 다니는 우리 교회로 갔다. 유 담임목사가 영채와 내 손목을 잡아 엮어 쥐며 반가워했다.
예배를 마치고 일산 저수지로 직행했다. 식당에 들어가 백숙을 먹은 후에 차에 올랐다. 나는 차를 천천히 몰면서 영채를 “때 묻은 여자”이라고 나무랐다. 그녀가 말한 돈 많고 권력 있는 자들의 이야기를 꼬집었던 것이다. 그녀는 처음 당하는 치욕이라며 눈물을 지었다.
“때가 묻었으면 부자 호텔업자에게 시집갔다가 10일 만에 모든 걸 팽개치고 도망쳐 나왔겠어요? 그리고 대통령을 시해한 최고의 권력층 인물이나 일류대학교 초창과 가까이 지냈으면서도 그들의 유혹을 뿌리쳤는데 때 묻은 여자라뇨?”
영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암튼 내가 사랑하는 여성은 속물이어서는 안 돼!”
그 말에 영채는 나를 부등켜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나는 성경 자체를 회의하는데 목사들은 “성경에 말씀하시길”을 전제하니 속이 후련치가 않다.
1991. 5. 22
영채의 전화를 받고 아미가로 갔다. 그녀의 여동생과 셋이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동생은 내 순수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에 더 듣고 싶다고 말했다.
매일 밤 영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보통 두세 시간씩 통화한다. 어제는 새벽까지 통화한 탓에 목이 부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녀는 또 전화를 걸었다. 영채는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결혼 상대는 아니라고 한다. 자기의 남편감은 “위대한 바보”여야 한다고. 그 위대함이란 모든 걸 포용하는 남자를 뜻한다고 말했다.
1991. 5. 24
장충동 힐튼 호텔에서 국제펜 종신 부회장 전숙희 작가가 주최하는 회식에 참석했다. 파티가 끝나고 열댓 명이 신라호텔 뒤 술집에서 다시 만났다. 거기에는 술값을 낼 우경재단 전낙원 회장과 소설가 김주영, 김원일, 고려대 김화영, 동국대 김선학, 연세대 정현기, 시인 이근배, 현대문학 대표 양 여사, 화가 이만희, 여류 조각가 박상숙 등이 모였다. 거기서 간단히 술을 마시고 우리는 고선으로 가서 3차를 마셨다. 그곳에서 김주영 형이 내 팔을 들어 올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을 보면 내 생각이 난다. 정말 소설을 잘 쓴다.”
그리고 양 여사를 향해 모두가 듣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요즘 일류 대학 나왔다고 끄떡대는 세상에 이 사람은 속으로 칼을 간다. 네까짓 것들 뭐냐 하고. 이 사람은 소설을 가슴으로 쓰고 있다.”며 극찬해 준다. 양 여사도 이번에 내 소설을 자기네 현대문학에 싣기로 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조각가 박상숙이 자꾸 나를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1991. 5. 25
영채 조카 돌잔치에 가니 온 식구가 환영한다. 나는 영채와 단둘이 안방에서 큰 상을 받았다. 어머니가 차려준 음식상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다.
밤에는 영채와 둘이 행주산성에까지 드라이브했다. 머리가 아프다는 그녀의 뒷덜미를 매만져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한강 고수부지에서 차를 세우고 비가 내리는 한강을 바라보았다.
1991. 5. 26
일요일. 약속대로 우리 교회에 나갔다. 유 목사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영채는 자기 엄마와 함께 나왔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예배를 봤다.
그녀의 어머니는 너무 자상하다. 그런 장모와 함께 산다면 행복하겠다. 그녀의 둘째 남동생 부부도 나를 무척 좋아한다. 서울대학교 미술대 조소과에 다니는 막내동생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수집해 온 그녀의 기록물을 보았다. 신문 잡지에 실린 사진과 글이 엄청났다. 어린이 시절에는 모델 생활을 해왔다.
1991. 5. 29
정신문화연구원 근처 어느 한적한 한식가든의 구석진 마당. 토스카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이 흐르는 달빛 푸른 밤. 9시 조금 전이었다. 영채와 나는 차 뒷좌석에서 처음으로 깊은 포옹을 가졌다. 내게서 그 지긋지긋한 고통이 탈색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모처럼 아름다움을 향유한 것이다. 그녀는 처음으로 남성을 사랑해 본다며 계속 나를 껴안고 애무했다. 내 몸은 그녀의 향기로운 살냄새로 점점 체취가 바뀌고 있었다. 갈매빛 산마루에 돋아난 달빛은 신이 축복해 주는 한 다발의 꽃이었다.
“나는 오래 살지 못해요.”
체중이 39킬로밖에 안 되는 데다 혈압이 50-60인 그녀의 가슴을 곱게 껴안아주었다. 그녀의 매끄럽고 물에 풀어질 것만 같은 하얀 살결에 취해보았다. 뒷좌석에 앉아 옷매무세를 정리한 그녀는 또 내 몸을 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이대로 우리 함께 멀리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나는 현실이 싫어요.”
그 말에 도취된 나는 그녀의 몸을 껴안고 다시 깊은 포옹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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