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단을 뒤흔든 내 단편 「그리고 말씀하시길」
1990. 8. 22
한국문협 미주 행사 초청으로 모래 미국으로 떠난다. 가기 싫은데 끌려가다시피 했다. 하지만 미국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할 수 있어 보람된 여행이었다. 모하비사막, 그랜드캐년, 요세미티 공원을 살펴보았다. 아주 실속 있는 여행이었다.
내 룸메이트는「영자의 전성시대」를 쓴 소설가 조선작이었다. 그는 공교롭게도 내 부산중학 친구 김영하(중앙일보 논설위원)와도 친구 사이였다.「영자의 전성시대」는 명작인데도 영화로 제작되어 대중화되는 바람에 작품의 순수성이 훼손되었다. 심지어 술집에서는 술꾼들이 젓가락으로 장단을 치며 “영자의 빤스”라고 외칠 정도였다.
“김 선생님 작품은 절대 영화제작을 허락하지 말아요.”
그 말에 나는 훗날『능수엄마』와『애나』등 내 인기 작품의 영화 제작이나 TV연속극 제안을 거절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막심하다.
1990. 9. 7
한길문학에 발표한「그리고 말씀하시길」의 삽화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어쩌면 그러게 내가 설정한 인물상과 닮았는지 어이가 없었다. 나는 특별히 부탁해서 삽화 원판을 집에 가져왔다. 화가 이름이 ‘반쪽이’인데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나는 그의 명성을 몰랐지만 여대생들이 관람 와서 그의 유명세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말씀하시길」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는데 한승원(한강 아버지), 박범신(인기작가) 등 소설가 20여 명한테서 칭찬이 쇄도했다. 어떤 극작가는 진짜배기라며 극화시키겠다는 말을 했고 어느 영화감독은 영화로 만들겠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고려대 국문과에서는「그리고 말씀하시길」을 소설 플롯을 공부하는 텍스트로 활용했다는 말도 들었다.
1990. 11. 6
30년 만에 모교 행사 참석차 용산고에 가보았다. 건물과 나무가 옛날 그대로였다. 대학에 못 간 한이 되살아났다.
1990. 11. 12
이기정 해군 제독한테서 부부동반으로 함께 여행하자는 청을 받고 진해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했다. 우리는 VIP 배를 타고 쥐섬 부근에서 낚시질을 했는데 대령급 8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오는 길에는 사천비행단 공군 손덕규 장군(손학규 형)의 단장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의 관사로 갔다. 밤에는 삼천포에서 회로 술을 마시고 이튿날에는 비행단 골프장에서 골프를 쳤다. 헤어질 때는 손 장군에게 내 책과 장병 위로금 30만 원을 전달했다. 올 때는 우리 부부와 이 제독 부부가 무주구천동에서 하룻밤을 자고 월악산으로 돌아왔다.
1990. 11. 17
문학평론가 임헌영이 세계일보에 내 첫 소설집『늰 내 각시더』와 김하기, 최윤의 작품을 평했는데 내 작품이 더 우수하다고 썼다. 김영현 <실천문학> 대표는 나를 이상주의자라고 추켜세웠다.
1990. 11. 22
<현대문학> 11호에 경향신문 논설위원이며 문학평론가인 이광훈이 내 문장을 극찬했다.
다음은 에이리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발췌한 글이다.
.....자유가 개인의 독립을 갖다 준다고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불안감과 무력감을 수반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차라리 강력한 지배자에게 굴복당하기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나치즘 생성 원인이 그러하다.
1990. 11. 24
<동서문학> 주간 김주영이 주선한 정지용 생가 답사에 참석했다. 김주영은 나와 중국에 간 이야기를 하며 “이 사람은 비행기에서 라면 끓여 먹은 사람.”이라고 좌중을 웃겼다.
밤에는 옥천군수의 초청으로 김주영, 김원일, 김화영, 최동호. 김종철, 이근배, 김선학, 등이 술집에 갔는데 나는 대학생들과 호텔에 남기로 자청했다. 자정 무렵에 취해서 돌아온 그들 중에서 맨 먼저 로비에 들어선 김화영 고려대 교수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은 당신 날이었어. 당신 작품에 대한 칭찬뿐이었다구.”
뒤따라 들어온 최동호 고려대 교수가 나를 추켜세웠다.
“오늘밤은 김용만 선생을 위한 밤이었어요.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모두 당신 칭찬뿐이니 이제 쓸 일만 남았어요.”
나중에 김종철 시인(훗날 헤리포터 출간으로 크게 성공)에게서 들은 술좌석 장면은 이러했다. 군수의 인사가 끝나고 술좌석이 무르익자 김종철 시인이 먼저 “김용만의 작품「그리고 말씀하시길」을 읽은 분 있어요?” 하고 내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김원일이 “내 동생 김원우(훗날 계명대 교수)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김용만의「그리고 말씀하시길」을 읽어보라는 거야. 여러분도 알다시피 원우가 남 칭찬한 적이 없잖아.” 그러자 여기저기서 내 칭찬이 튀어나왔다.
1990. 11. 27
예술은 존재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낸다. 예술의 통로를 거쳐서 만나는 삶이 참다운 삶인 것은 그것이 창조된 삶이기 때문이다. - 잔아(김용만)
1990. 12. 7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김원일이 신사동에 있는 술집 고선에서 회식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도 내 칭찬들이 대단했다. 김주영 형은 많은 작가 시인 평론가들 앞에서 내 손을 잡아 올리며 “야가 10년 내로 날 잡아먹을 애.”라고 칭찬했다.
1990. 12. 12
경향신문 앞 ‘이따리아노’에서 논설위원이며 문학평론가인 이광훈 씨와 차를 마셨다. 그는 <현대문학> 11월호에 실린 내 작품을 월평 한 적이 있는데 “사장된(묻혀버린) 우리말을 절차탁마해서 빛낸 문장”이라고 칭찬했다.
1990. 12. 13
‘보리회’ 모임에 참석했다. 경북. 대구 출신 문인들 모임인데 충청도 출신인 내가 끼게 되었다. 대구에서 사업하며 살아온 게 참여 이유였다. 그만큼 나를 참여시키고 싶어 했다. 참여 문인은 김원일, 김주영, 이문열, 정호승 등 수십 명이었다.
<실천문학>에서 책이 나오는 바람에 옛날에는 사찰하던 정보형사인 내가 이제는 사찰을 당할 입장이 되었다.
1990. 12. 14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최로 내일까지 연세대 강당에서 “민족문학제”가 열린다. 연출은 문호근(문익환 목사 아들)이 맡고 각본은 최인석 서울대교수가 썼다. 실질적 총괄 기획은 김영현이 맡은 셈인데 나는 기획위원(6명)이어서 참석했다.
행사가 끝나고 술을 마시는데 고은 시인이 나를 곁에 앉히고, 수고한 사람들 모두 무대로 불러올렸다. 정보형사가 쫙 깔렸을 테니 조심스러웠다. 참 묘한 팔자다. 이제는 정보계통에 신경을 써야 하다니. 곧 나올 예정인 <실천문학> 발표작이 걱정이다. 가장 진보적인 문예지인데 거기에 소설이 실릴 경우 어떠할지. 하지만 내가 정보형사 출신이어서 그런지 조용했다.
1990. 12. 22
선유리 이호철 선생 댁에서 ‘90 서울소나무’ 출판기념회를 가졌는데 내 작품을 읽고 수강생 박실이 “김용만 선생 작품은 세계적인 문장”이라고 감동하면서 “우리 회원들은 엄청난 사람을 곁에 두고 있다.”라고 과찬했다. 그날 내 앞에 앉아 있던 남정현 선생도 내 작품을 칭찬하며 내 손을 잡아주었다.
동아문화센터 출신 등단작가 모임에서 내가 회장으로 뽑혔다. 총무에는 중편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선이 뽑혔다. 나는 그동안 참석을 피해왔지만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1990. 12. 28
신사동 고선에서 권위지인 <문학과지성사>의 회식이 있어 모였다가 자정 무렵 홍정선 문학평론가, 김원우 소설가, 김영현 소설가와 넷이 2차로 방배동 술집에서 두 시간 동안 양주를 마셨다. 12시가 넘으면 장사를 못 하지만 불 꺼진 길가에서 삐끼에게 안내되어 뒷문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고은 선생이 안성 자택에서 시집 <눈물을 위하여>를 보내왔다.
1991. 1. 1
내 젊은 시절의 일기장 제목은 <체험창조>였다. 체험과 창조의 두 관계항을 놓고 볼 때 전자가 우연적 삶이라면 후자는 필연적 삶이랄 수 있겠다. 하지만 체험이라고 하는 모험적인 단어를 고교시절부터 즐겨온 걸로 보아 그 우연적 삶 역시 어떤 운명적 조화 탓으로 여겨져 소름이 끼치곤 한다.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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