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56회)

충남시대 2025. 1. 21. 11:57

퍼즈에서 일본 청춘 한쌍의 멋진 자살


1991. 1. 2
  
  나는 왜 소설가가 되었나?
  나는 신(神)이 되고 싶었다. 내 나름의 종교를 만들고 싶어 소설을 택했다. 그래서 문학을 일반종교보다 상위(上位) 개념에 놓고 살아왔다. 소설창작을 신의 창조행위로 여겨왔던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일반종교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유한성의 한계'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진작 종교를 갖고 싶었지만 종교를 갖는 순간 내 문학정신이 규범화(規範化)되어 굳어질까 두려웠다. 그러니 내가 만들고 싶어 한 내 종교는 일반종교가 아닌 다른 무엇일 것이었다. 새로운 교리, 새로운 신자, 새로운 사물, 새로운 세계, 그게 내 소설이 되어야 한다.

1991. 1. 3

  결국 성지순례가 취소되었다. 전쟁 때문에 신분보장을 할 수 없다며 안전을 택한 것이다.

  며칠 전이었다. 내 친구 현 목사가 이끄는 한국기독교 성지순례팀에서 연락이 왔다. 문인들을 주축으로 성지순례를 떠나는데 합류하자는 청이었다. 그가 보내준 명단에는 소설가인 김승옥, 정을병, 유재용, 평론가인 구인환 서울대 교수, 가곡「보리밭」 작사가인 박화목 시인 등 32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모두 기독교인이고 나만 신자가 아니었다. 갈릴리여행사에서 11박 12일 동안의 이집트, 이스라엘 여행 계획표를 보내주었다. 참여자 중에는 인기 탤런트 안영채(가명) 자매도 끼어 있는데 희곡작가이기도 한 안영채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TV에서 본 그녀는 내가 무척 좋아하던 동양적 미인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오늘쯤 출발할 예정인데 미국에서 15일 시한으로 이라크에 선전포고를 해놓은 상태여서 출발이 힘들 것 같았다.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은 터지게 마련이었다. 이라크 후세인 대통령은 미국 부시 대통령의 말을 일축하며 전쟁이 터지면 우선 이스라엘을 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심지어 화학무기도 사용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상태다.
  마침 유재용 소설가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유재용 형의 농담이 아주 걸작이다.
  “15일 아침 9시 반에 텔아비브를 떠나니까 괜찮지 않겠어? 부시도 싫어하고 후세인도 싫어하는 전쟁인데 15일 하루 24시간은 견디지 않겠어?”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이스라엘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가 어느 나라 소속이냐고 물었다. 유재용 형의 입에서 또 어이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스라엘 비행기라도 공중에 멀리 떠갈 텐데 식별이 잘 되겠어? 그런 비행기를 대공포가 떨어뜨릴 수 있겠어?”
  나는 배꼽을 잡고 웃었고 그 웃음이 죽음마저 두렵지 않게 했다. 때문에 유재용 형과 모임에서 만나면 저절로 농담이 터져 나오게 마련이고,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곤 했다. 김승옥 소설가 역시 우리의 농담을 좋아하는 편이다. 진지만 대화라면 말을 끊지 않는 그는 우리의 농담에는 무적 재미를 느낀다. 나는 김승옥 소설가에게 이번 여행 취소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일행 모두가 여행을 두려워하면서도 체면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는 피씩 웃고 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1991. 1. 4

  이호철 선생과 불관동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나는 8살 연상인 그에게 “조직을 생각하지 말고 고고하게 조용히 지내시라”고 진언했다. 조용히 지내시면 50점은 거저 얻는다고 했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우리는 술에 취한 상태로 그의 서재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서재에서 자고 이튿날 헤어질 때 그는 재일교포 이희성이 보내준 책을 내게 주었다.

1991. 1. 5

  민족문학작가회의 신년하례식에 참석하여 술을 마셨다. 밤에는 천상병 아내가 경영하는 인사동 ‘탑골’에서 김남주 시인, 이시영 시인 등과 술을 마셨다. 감옥살이를 9년간 치렀는데도 김남주는 그 고충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1991. 1. 6

  나는 그동안 공격적인 삶보다도 방어적인 자세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벙그죽 웃어야 했다. 활달한 웃음이 아니었다. 내가 가끔 큰 소리로 웃는 것은 그런 소극적인 웃음에 대한 반항인 셈이었다.

  『스티븐 호킹의 우주』는 아주 재밌다. 시간에 종말이 왔으면 정말 마음이 편안하겠다. 공간적으로도 끝이 없고 시간적으로도 시작과 종말이 없는 우주, 그래서 조물주가 할 일이 없는 우주라는 결론이다.

1991. 1. 27

  아내와 춘천 이외수 소설가 집에 놀러 갔다. 내 아내와 이외수 아내는 양구중학교 동창 사이다. 대문 앞에서 우리 부부를 기다리던 이외수는 내 손을 잡고 마당을 지나 거실로 들어서더니 노래방 마이크부터 내밀었다. 어색해진 나는 얼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내 단편「그리고 말씀하시길」을 읽었다며 참 잘 썼다고 한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정말 잘 썼다고 강조한다. 헤어질 때는 내게 주겠다며 자기가 그린 물고기 그림을 꺼내왔다.
  집에 돌아와 단편「보이지 않는 시계」를 퇴고했다.

1991. 2. 19

  김철 연세대 교수 겸 문학평론가, 최두석 관동대 교수 겸 시인, 윤지관 교수(훗날 한국문학번역원장. 차관급), 김영현 실천문학 주간과 함께 점촌 홍정선 문학평론가 상가에 다녀왔다. 차 안에서 내 과거를 이야기해 달라고 해서 정보형사 시절 얘기, 춘천옥 성공 비화 등 오랜 시간 떠들어댔다. 모두 내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혁신행위는 문학의 자유놀이라는 자기 탐닉의 불가피한 결론 지점을 향해 함께 매진한다.
                                                                        - 앨빈 커난의 “문학의 죽음”에서

1991. 2. 27

  <현대문학>과 <실천문학>에 내 작품이 동시에 실렸다. 신년 벽두에 보수지에 중편으로, 혁신지에 단편으로 장식한 셈이다.

1991. 3. 11

  우리 부부는 정을병 씨 부부, 이호철 씨 부부 등과 10일 동안 호주 뉴질랜드 여행길에 올랐다. 시드니는 역시 세계 3대 미항이었다.
  여행 중에 오클랜드에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유라가 호들갑을 떨었다. 온종일 전화가 걸려온다고 야단이다. 나는 기어이 성공했구나 하고 흥분했다. 지난번 두 작품이 시끄러웠는데 그 후타가 성공한 모양이다.

1991. 3. 12

  퍼즈에 도착하여 시내관광을 마치고 낭떠러지가 높은 해변가를 관광했다. 벼랑 위에는 까마득한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 너른 평원을 일본 청춘 한 쌍이 승용차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 가속이 붙은 상태로 해변을 향해 날았다고 한다. 멋진 자살이었다. 아득한 벼랑 아래 모래톱에는 승용차의 녹슨 뼈대가 아직도 파도에 씻기고 있었다. 가슴이 짜릿했다. 감격이었다. 멋이랄까?

1991. 3. 22

  <창작과비평사> 이시영 시인한테서 편지가 왔다. 소설을 잘 쓰니 다음 작품을 읽게 해달라고.
  평론가 김명인 강형철과 모처럼 점심을 했다. 강형철 시인은 내게 “형님 작품을 잃고 놀랬어요.” 한다. 내가 여행 중일 때 우리집으로 전화까지 걸었다고 한다.

1991. 3. 27

  소설가 이문열, 김원일과 초저녁부터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문열은 요즘 민작과 갈등이 심하다. 하일지를 자기가 키웠는데 포스트모더니즘 붐을 일으켜주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는 자기 작품『시인』에 사인해서 내게 주었다.

1991. 4. 7

  안동문화방송 사장 김용이 내 글을 잘 읽었다고. 아나운서 양진수 아나운서가 말했다.
  국군보안사령부 정치담당 휘문이가 용진회에 나오라고 하지만 나가지 않았다. 문학과 동떨어진 동창과는 어울리기 싫었다.

1991. 4. 12

  이호철 선생과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나는 8살 연상인 그에게 “조직을 생각하지 말고 고고하게 조용히 지내시라”고 진언했다. 조용히 지내시면 50점은 거저 얻는다고 했다. 술에 취한 상태로 선생의 서재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사후세계까지 이야기했다. 서재에는 일본 책이 많았다. 재일교포 이희성이 보내준 책을 내게 주었다. 그의 서재에서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