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53회)

충남시대 2025. 1. 2. 13:59

「에미가비」


1989. 4. 22

  오늘부터 5월 11일까지 가기 힘든 소련(러시아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헝가리, 유고를 여행했다. 소련은 생필품이 부족한 나라여서 선물용으로 볼펜이나 연필 같은 학용품과 T셔츠, 팬티, 브래지어 등을 준비했다. 특히 소련에서는 영국담배 말보르를 선호한다는 말을 듣고 3박스나 준비했는데 정말 공항 검색대에서 담배 2갑을 주니 친절한 서비스를 받았다.
  여행 코스는 동경 – 모스크바 – 우주베키스탄 타쉬켄트 – 레닌그라드(페테스부르크) – 부다페스트 –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 – 베오그라드 공항– 코펜하겐 – 암스텔담 – 마스트릿치 – 브뤼셀 – 파리 – 런던 – 서울 순이었다.

  우주베키스탄 수도 타쉬켄트에서는 시장 상인중에서 우리 동포를 여러 명 만났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처음 만나본 동포여서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동포는 우리에게 먹을 것을 팔고도 돈을 받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값을 치르고 우수리를 받지 않았다.
  밤에는 초상화를 그리는 이젤이 즐비한 아르바트 거리에서 동포 청년을 만났다. 내가 반가워서 엄마 아빠에 대해 물으니 모국어를 모르는 그 청년은 “에미가비?” 하고 내 말을 받았다. 언뜻 생각이 떠올랐다. 러시아 동포들이 중앙아시아로 추방되어 비참한 생활을 꾸려갈 때 철없이 졸라대는 어린 자식들에게 “에미 애비 속을 작작 썩여라”고 화를 냈을 텐데, 부모의 그 신칙이 “에미가비”로 들렸을 것이다. 나는 귀국 즉시 그 이야기를「에미가비」란 제목으로 <스포츠서울>에 발표했다.
  *
  쌍쌍으로 어울린 젊은 남녀들이 어스름한 숲 속에 앉아 입술을 녹이고 있었다. 우주베키스탄(소련) 수도 타슈켄트의 밤은 그래서 더 정겨웠는지 모른다. 소련의 칙칙한 선입견을 씻어주는 풍경이었다. 고르바초프 정권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디노스트(개방)를 주창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철의 장막’에 대한 살벌한 이미지가 생생한 시기인데 그런 눈요기는 사뭇 기분마저 달뜨게 했다.
  공원을 빠져나온 나는 도로 폭이 15M쯤 되는 뒷길로 접어들었다. 가로등 밑에 이젤을 쭉 세워놓고 앉아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 하얀 허벅지를 까낸 채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피워대는 아가씨들의 멋스러움이 내 기분을 더욱 달뜨게 했다. 그리고 노점 카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미국 가수 마이클 잭슨의 노래와 그 곡에 맞춰 열나게 팔다리를 흔들어대는 청소년들의 디스코 춤은 놀랍다 못해 당혹감마저 느끼게 했다.
  철의장막인 여기에도 미국의 대중문화가 번지고 있다니!
  미국 대중문화의 무서운 번식력을 생각하며 도로 한복판을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던 내 발길이 열댓 명의 젊은 패거리가 모여 있는 곳에서 저절로 멈춰졌다. 주위를 비틀거리는 술 취한 청년들 중에서 나는 몽고리언 계의 청년에게 정다운 시선을 주었다.
  “혹시 고려인이냐?”
  하지만 그 청년은 아무 대답 없이 술기가 흥건한 눈을 맨송맨송 굴릴 뿐이었다. 이번에는 끼리끼리 통할 수 있는 말로 물어보았다.
  “엄마 아빠란 말 아니?”
  “에미가비?”
  그는 감을 잡은 모양인지 얼굴을 환하게 열며 엄지손가락 하나씩을 뽑아 내 코앞에 나란히 세웠다. 그리고 두 엄지의 마디를 구부려 마치 신랑신부가 초례청에서 맞절하는 형국을 꾸며 보였다. 에미와 애비, 그렇지. 그 에미애비가 탈색되어 에미가비가 되었구나.....
  순간 왈칵 가슴에 치미는 화롯불 같은 열기를 느끼고 경제학을 전공한다는 그 청년의 손을 힘껏 잡아주었다. 그도 손아귀에 힘을 꽂았다.
  “부모님은 뭘 하시지?”
  나는 그가 부모한테서 들어 배웠을 모국어 중에서 하필 에미애비 만을 기억하는 것이 이상해서 부모의 직업을 물어보았다. 그는 자기 아버지는 건설 노동자이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판다고 대답했다. 순간 어린 시절에 자주 들어왔던 어른들의 신칙이 머리를 스쳤다.
  에미애비 속을 작작 썩여라.
  낯선 땅에서 생활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지치고 지친 동포들은 부모의 고생을 이해하기는커녕 철없이 말썽만 피우는 자식들을 그런 말로 나무랐을 텐데 그 꾸중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향수 어린 언어였다. 꾸중이라기보다 숫제 자기의 고된 팔자를 탓하던 그 말은 우리 부모들이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그러했듯, 소련 동포들이 고단한 삶을 살아오면서 버릇처럼 뱉어 온 일종의 푸념이었다. 끼니조차 부지하기 힘든 판국에 어린 자식들마저 철없이 굴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에미애비 속을 작작 썩여라.” 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향수 어린 말을 소련 동포 후예들이 기억하고 있다니 참으로 기특했다.
  우리는 서투른 영어로나마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한국의 실정과 우즈베키스탄의 곤궁한 생활상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였다. 그들 또래의 주정뱅이 청년 하나가 나한테로 다가와 담배 한 개비를 청했다. 팔목 하나가 없는 불구자였다. 내가 담배를 선뜻 갑째 꺼내주자 그 주정뱅이는 넉넉한 기분이 되어 저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동포 청년이 따라가서 투박한 러시아 말로 무어라고 지껄였다. 구걸을 나무라는 투였다. 나는 재빨리 뒤쫓아가 동포 청년을 챙기며, 담배는 원래 정분으로 나눠 피우는 거라고 변명해 주었다.
  두 조국에 대한 애정, 동포에게 눈곱만치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깊디깊은 모국애와 현재 살고 있는 소련의 치부를 감추고 싶어 하는 충정이 가로등 불빛만큼이나 깨끗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술냄새 풍기는 그의 몸을 강렬하게 껴안아 주며 “내 자랑스런 새끼!” 하고 귓불에 대고 속삭여주었다. 그러자 청년이 신나게 웃으며 물었다.
  “쌔끄?” 
  “그래그래, 내 새끼 내 아들이다 그 말여.”
  “유어 쏜? 노! 노!”
  “뭣이 어째? 어째서 노우냐?”
  “아이 해브 마이 파더 마이 머쎄.”
  “어이구 지랄, 네 엄마 아빠가 따로 있겠지만 우리는 한 통속 한 핏줄이다 그 말여, 이 멍청한 놈아.”
  “히히히..... 하안뚱쑥 하안삣쭐? 오케이, 아이 라이크 이트!”
  그는 손뼉을 치며 마냥 헤프게 웃어제꼈다. 그리고 헤어지는 마당에서도 손사래를 쳐주며 “하안뚱쑥, 하안삣쭐” 하고 연방 소리를 질러댔다. 그 쉰 듯한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중앙아시아의 밤하늘로 멀리 퍼져나갔다. *

  (이 콩트를 <스포츠서울>에 발표할 당시인 1990년도에는 우주베키스탄 전체인구 1900만 명중에서 우리 동포는 1%인 19만 명이었다.)

1989. 5. 24

  지난번 유고 연방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여행할 때였다. 조병화 선생이 내게 꿈, 사랑, 멋을 위해 살라고 했다. 그는 나와 셋이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신세훈을 나무랐다. 나는 민망했다.

  어제는 소설가 유현종과 마지막으로 골프를 치러 갔다. 소설 지망생이 골프를 친다는 게 이미지에 좋지 않아 골프채를 창고에 숨겼다가 전투기 조종사인 사위에게 주었다.

1989. 6. 6

  안성 주택단지에 있는 고은 시인 집에서 소설가 이문열, 김원일, 송영, 등과 바둑을 두며 놀았다.

  다음은 도올 김용옥의 말이다.
  “욕을 하나의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푸코가 말한 것처럼 언어는 권력의 한 체계입니다. 즉 욕설을 저속한 것으로 규정한 사람들은 그 권력 세계에서 득을 보고 있는 자들이지요.”

1989. 8. 9

  가볼 수 없는 설산을 오르기 위해, 두만강을 만나기 위해, 그것도 8.15를 맞아 분단 저쪽을 우회해서 해후하기 위해, 이른 아침 88올림픽대로를 달렸다. 김포공항 2층 KAL 탑승구에서 홍콩행 비행기에 올랐다.
광동의 사철 피는 꽃..... 大紅花
북한의 꽃.....진달래

1989. 8. 10

  11시에 북경 국제공항에 내렸다. 비가 내린다. 가이드 말에 북경 시내만 600만에다, 외곽 400만, 합계 1000만 명이라고 한다. 대학만 40여 개. 중등전문학교 100여 개. 수도로서의 면모는 약 560년 전부터 갖추었는데 1620년대 명나라 3대 주혜가 남경(상해)에서 북경으로 이전했다. 넓이는 168입방 키로, 차량은 40만대라고 한다. 자금성 역사는 560년. 노동자 1달 수입은 300웬, 조선족은 1부부에 2 자녀, 중국인은 1자녀만 낳는다.
  대학은 등소평 이후 입시 시험을 치를 수 있고, 모택동 시대에는 공농병학교. 자유연애. 이혼자유. 여자가 강하다. 결혼등기증 없으면 호텔에 못 들어간다. 개인 호텔에서는 눈을 감아주고 정부에서는 단속한다. 여자 2회 강간은 총살.
  燕山은 북경에서 제일 가까운 산. 그래서 북경을 연경(燕京)이라고 했다. 만리장성....1키로(2리). 총 6000키로(1만 2천 리).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 중국 전체 인구 180만 중에서 60만이 조선족이다. 유치원부터 조선문자 배우고. 대학에서는 중국어를 배운다. TV. 신문 등 조선어.
  연길에서부터는 가을 날씨다. 백두산에 이르는 길목에 조선족 초가집이 보인다. 동포의 생활상이 비참할 정도다.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