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아버지와 고향 어머니의 한 맺힌 합장
1989. 8. 25
중국이 개방되기 전 ‘죽(竹)의 장막’일 때. 8월 10일부터 8월 23일까지 또 13일 동안 중국을 다녀왔다. 여행경비는 백두산 코스 40만 원을 포함하여 310만 원이고 코스는 김포국제공항에서 홍콩 – 항주 – 서호 – 상해(임시정부, 홍구공원, 이화원, 조차구역) – 장춘 – 길림 – 장백산(백두산천지에 태극기 꽂기) - 장춘 – 북경 – 만리장성 – 명 십삼릉 – 자금성 – 천안문광장 – 인민대회의당 – 모택동기념관 – 북경백화점과 시내관광 – 계림(독수봉) – 광주 – 열차편으로 홍콩 – 대한항공편으로 서울에 도착.
중국은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을 주석으로 삼은 사회주의 국가로 건국되었다. 중국의 행정구역은 23개 성과 5개 자치구, 3개 중앙직할시(북경, 상채, 천진)와 2137개의 현으로 구성되었다. 면적은 한반도의 43.6배이며 소련, 캐나다 다음으로 세계 3위다. 인구는 현재 10억 5천 7백 만이다.
일행은 김주영 소설가, 김원일 소설가, 이문구 소설가, 김종철 시인, 이근배 시인 등 20명이었다. 백두산 등정에서는 나 혼자 차디찬 천지연에 알몸을 담갔는데 모두 내 모습을 보고 박수를 쳤다.
그런데 자금성에서 내가 혼자 길을 잃는 바람에 일행 모두 하루 관광을 포기했다. 아침에 자금성을 향해 달리는 버스에서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고 자금성 관광 후에 버스가 대기할 위치와 숙소인 호텔 이름을 설명할 때 나만 졸았던 것이다. 훗날 문단의 화제가 된 그 아찔한 사건은 이러했다.
각자 자금성을 관광한 후 마지막 후문 앞에서 대기하는 버스에 올라야 하는데 나는 후문으로 나가지 않고 다시 천안문 쪽으로 가서 자금성 밖에서 버스를 기다렸던 것이다. 2시간 이상을 기다려도 버스가 나타나지 않자 그제야 내 실수를 직감하고 우선 급한 대로 호텔을 찾아가기로 작정했다. 광장을 지나는 수많은 차 중에서 조그마한 자가용을 세웠다.
“아임 쏘리. 아임 코리언.”
자가용은 친절하게 나를 태웠다. 젊은 기사는 타이페이 사업가였다.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자유중국(대만) 사람이 적대관계인 공산국가 중국에서 사업을 하다니? ‘철의 장막’인 소련을 여행할 때 미국인 마이클 잭슨의 노래가 판치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운전자에게 “아이 엠 리치 맨”이라고 말해주었다. 부자라고 해야 내게 친절을 베풀 것이었다. 우선 큰 호텔을 찾아갔다. 곤륜호텔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기사와 함께 프런트로 향했다. 안내 직원 중에서 아가씨 석을 찾아가 손을 잡고 사정했다.
“살려달라!”
당황하면서도 친절한 미소를 머금은 아가씨는 내 보디랭귀지를 귀담아 주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아까 버스에서 조는 중에도 가이드가 “저쪽”이라고 손짓하는 모습이 떠올라 나는 서울의 서대문 쪽을 연상했다. 베이징의 중심대로에서 서대문 쪽 호텔 수를 물으니 100개가 넘는다고 했다. 나는 아가씨에게도 “아임 리치 맨.”이라고 아부하며 협조해 달라고 사정했다. 아가씨는 손님 안내를 무시한 채 서대문 쪽 모든 호텔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20여 번쯤 걸다가 아가씨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찾았다고 소리쳤다. 일행 중에 김용만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타이페이 차를 타고 그 호텔로 향했다. 그런데 북한팀에 “김용민”이 있었던 것이다. 북한에 납치당하면 큰일이었다. 얼른 차에 올라 속도를 내라고 소리쳤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 아가씨에게 부탁했다. 아가씨는 계속 전화를 걸어댔다. 고마웠다. 나는 기사를 데리고 구내 식당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낯익은 미니버스가 주차장에 나타났다. 우리 일행 차였다. 차에서 내린 일행은 초주검이 되어 말도 못 한 채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자금성 후문 앞에 차를 세워놓고 온종일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봐, 김용만은 무슨 수로든 찾아온다고 말했잖아!”
이근배 시인의 말이었다. 곤륜호텔이 바로 우리가 예약한 호텔이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는 숙박료를 받지 않으면 예약손님을 등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니버스에서 2개의 큰 짐가방을 내린 나는 돈 봉투 두 개를 만들어 아가씨와 대만 기사에게 나누어주었다. 모두 입이 째졌다. 나중에 가이드는 이런 말을 했다.
“아가씨에게 주신 돈은 그녀의 3년 치 월급과 맞먹는 돈에요.”
1989. 11. 11
이호철 선생이 선유리 집에서 합평할 때 내 습작품인 단편소설 「그리고 말씀하시길」이 수작이니 30여 명의 제자들에게 잘 읽어보라고 권했다는 말을 들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내게 “착하면 복 받는다. 신용을 지켜라. 남의 물건은 지푸라기도 만지지 마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다짐하셨다. 그래서 제목을「그리고 말씀하시길」로 정했는데, 1990년 <현대문학>에 등단 후 처음으로 <한길문학>에 발표하자 “19993년은 잔아의 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한국문단에 화제를 뿌렸다. 심지어 고려대학교 국문과에서는「그리고 말씀하시길」을 소설 창작의 구성 텍스트로 활용할 정도였다.
1989. 12. 15
가산동 춘천옥 건물을 완공했다. 지하 1층 지상 3층짜리 건물로 평수가 컸다. 코너에 위치한 건물이어서 현관 부분에 멋을 부렸다. 건물 밑동에는 삥 둘러 키 작은 앉은뱅이 대나무를 심었다. 이제 자리가 넉넉하니 손님이 밀릴 걱정은 던 셈이었다. 1,2층만 해도 테이블 숫자가 100개나 된다. 2년 가까이 건물을 짓느라 폭삭 늙었다. 공사 중에도 소설을 썼다.
1990. 3. 12
몇 개월 만에 태호가 돌아왔다. 현관에 들어선 그놈을 나는 내동 바라보기만 했다. 그놈은 인사도 없이 부엌으로 들어가다가 내가 계속 바라보자 혼자 웃는다. 유라의 장난질에 밀려 내 방에 들어온 그놈은 내가 “중학 때나 대학 때나 똑같구먼.” 했더니 히히히 웃었다.
1990. 5. 10
소설을 쓰다 말고 부엌에 있는 아내에게 “요새는 마누라와 사는 게 참 재밌구먼.” 했다. 아직 수술자리가 덜 아문 아내는 “그 말을 하려고 불렀어?” 한다. 아내의 그 말이 20년 만에 처음 재미를 느끼게 했다.
1990. 5. 17
이호철 선생의 제의로 둘이 안톤 체홉 작「벚꽃동산」을 보러 호암아트홀에 갔다. 감동적인 연극이다. 러시아인들의 연기는 너무 자연스럽다.
술집에서 이호철 선생이 “아까 연극 보며 울었지?” 한다. 정말 귀신이다. 둘이 실컷 취했다.
1990. 6. 7
숙명여대 김주연 교수의 초월성은 나와 동감이다. 형이상학에 대한 관심을 일부러 외면할 뿐 아니라 초월성을 통해 진지하게 얼굴을 들려고 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여전히 햄릿도, 파우스트도, 라스코르니코프도 창출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섹스피어도, 괴테도, 도스토에프스키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김원일이 단편모음을 내게 빌려주었다.
1990. 6. 29
내일부터 동해안 영진해수욕장 모래톱에 모신 아버지 산소를 22년 만에 고향땅에 모시기로 했다. 정말 오랜만에 고향땅을 찾아가시는 셈이다. 양력 7월 2일(음력 윤 5월 9일)이 하관일이다. 백제 계백 장군의 수련장이 있는 청등산 능선머리에 모신 어머니 산소에 합장할 예정이다.
1990. 7. 1
영진 모래톱 공동묘지를 출발한 운구차는 강릉을 거쳐 경부선을 타고 천안, 공주를 거쳐 부여로 향했다. 이튿날에야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부여 누나네에서 하룻밤을 지낸 영구차는 가랑비를 맞으며 청등산에 도착했다. 산역이 시작되자 아버지 고향인 토산과 내 고향인 새뜸, 청남리 현지인 등 주민 100여 명이 몰려와 북적대기 시작했다. 대형 천막이 세 군데 쳐졌다. 미리 준비해 둔 석물을 맞추고 잔디를 덮었을 때는 해가 질 무렵이었다. 마지막으로 평토제를 올렸다. 모처럼 깨끗한 상석 위에다 제물을 차렸다. 가난해서 떠난 고향인데 아낌없이 장사를 치르고 싶었다. 고향에는 큰 부자가 되었다는 내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선물용 봉투 속에도 이것저것 두둑이 챙겼다.
어머니 봉분이 반쯤 헐리기 시작했다. 황토와 백회가 섞인 좋은 땅이었다. 나는 현대식으로 네모지게 만든 봉분 안에 두 분이 안치되도록 치수를 정확히 알고 싶었던 것이다. 매부가 발 쪽을 살금살금 다듬어내니 드디어 옷자락이 보였다. 발끝 부분이었다. 키 작은 어머니의 신장을 대중 잡아서 아버지를 옆에 뉘었다.
“오랜만에 새 장가드시누먼.”
부여매부의 농담이었다.
1990. 8. 1
내 단편「그리고 말씀하시길」은 여전히 뛰어난 작품이라고 칭찬이 대단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김원일, 김종철, 외국어대 이탄 교수 등과 삼계탕을 먹었다. 밤에는 현대소설 대표 박사장과 바둑을 두었다. 그자는 서울대 상대를 나왔는데 약삭빠르고 너무 빈틈이 없어 마땅치 않았다. 그와 함께 지내는 편집위원들도 (김석희 번역가, 서울대 장 교수 등) 나를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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