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 자서전

이상헌의 인생 이야기 아버지와 나의 삶 20회

충남시대 2025. 4. 23. 10:00

그만하고 싶어도 주방장이 허락하지 않았다. 소개비를 이미 지불했으니, 노예처럼 한 달 동안은 일해야만 했다. 쇠 수세미로 불고기 불판을 닦고 그릇을 씻는 재미없는 일은 계속되었다. 홀 안에서 일하는 아가씨들과 눈인사를 하여 알게 되었다. 아가씨는 손님이 먹다 남은 맥주와 불고기를 주방 창구에서 먹으라고 눈짓했다. 달착지근한 소불고기를 난생처음으로 맛보았다. 살살 녹는 소불고기는 얼마쯤 할까? 얼마나 돈이 많으면 이 비싼 것을 먹을까 생각을 자주 했다. 보름 정도가 지나자 주방장이 내게 술을 사주었다. 열심히 일하니 내게 믿음이 생긴 것 같았다. 마요네즈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식용유를 통에 넣고 달걀흰자를 뺀 노른자를 넣어 휘휘 저으면 마요네즈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요네즈 만드는 것은 내가 전담했다. 밤 열 한시가 되면 홀의 상이 치워지고 잠을 잔다. 밤중에 술병이 날아다니고 몽둥이를 든 직원 간 싸움이 시작된다. 전국 각지에서 온 직원들이 힘 겨루기하여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쥐 죽은 듯이 일만 하는 나는 모든 폭력에서 피해 갈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 날은 밤샘 영업을 하는 날이다.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었다. 밤샘 영업을 하더라도 손님은 뜸했다. 캐럴이 흐르는 명동 골목, 지나가는 선남선녀를 보기 위해 식당 문 앞에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영업하느냐고 물으면 영업 끝났다고 둘러댔다. 내게 잘 대해주는 홀 아가씨가 놀러 가자고 한다, 나는 돈이 몇 푼 없어 놀러 다니는 것을 싫어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월급으로 5만 5천 원을 줬다. 나는 그 돈으로 독수리가 그려져 있는 카세트 라디오를 장만하였다. 노래도 듣고 외국어도 공부할 겸 산 것인데 아버지한테 그런 걸 사느라 한 달이나 일했냐며 혼났다.
노래도 듣고 외국어도 공부할 겸 산 것인데 아버지한테 그런 걸 사느라 한 달이나 일했냐며 혼났다. 대학은 입영통지서를 제출하자 쉽게 휴학 처리가 되었다. 군대에 가면 밥을 굶는다는 말에 밥을 적게 먹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밥을 많이 먹기로 소문나 있었다. 중학교 1학년 간부 여름수련회 갔을 때이다. 유하리 금강 변 소나무 숲에 텐트를 쳤다. 물을 길어다가 밥을 해 먹는데 쌀밥을 먹었다. 보리밥도 배부르게 먹지 못할 때 쌀밥은 반찬 없이도 먹을 정도로 맛있었다. 공깃밥으로 두 그릇은 먹어야 양이 찼다. 그때 선배들은 밥을 많이 먹는 내게 ‘두 그릇’이라는 슬픈 별명을 지어줬다. ‘야, 두 그릇’ 내 이름 대신에 ‘네’ 하며 달려갔었다. 양계와 양돈을 하는 외갓집에서 날 오라고 했다. 외할머니께서 사료만 축내며 크지 않는 중간 정도의 돼지 한 마리 꺼내 잡아먹고 군대에 가라는 것이었다. 한 번도 잡아보지 않았지만, 앞다리끼리 묶고 뒷다리끼리 묶고 앞다리와 뒷다리를 연결하여 꽁꽁 묶어놓고 망치로 가격을 해 난생처음 돼지 한 마리를 잡았다. 우리 집으로 가져간 돼지고기로 가족은 포식하였다. 스물두 살 군대에 가는 거라, 다른 친구들에 비해 조금 늦었다. 친구들 송별회 자주 쫓아다녔는데, 정작 내가 군대에 갈 때는 남아있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한 팀이 만들어져 우리 집 사랑방에서 술과 음식을 준비해 밤새 노래 부르고 떠들었다.


힘든 군대 생활

1979년 4월 17일 군대 가는 날이다. 어머니가 잘 갔다 오라며 손짓을 하신다. 눈물짓는 어머니 얼굴을 보지 않으려 마구 달려갔다. 4㎞ 정도 건평에 가면 논산으로 가는 시내버스가 있다.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에 내려 이발소로 향했다. 군대 가느냐며 장발을 이발기로 밀었다. 한 올도 없는 머리카락은 앞으로 닥쳐올 황량한 군대 생활처럼 싸늘하게 느껴졌다. 논산에서 친구들이 마지막으로 밥 사준다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