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두어 번 하고 나면 월요일 오전 일과가 끝난다. 열병 도중에는 무더위로 여기저기서 쓰러져 업고 양호실로 가기도 했다. 오후 수업도 교련 교사가 연습한다고 하면 수업하기 싫은 교사는 교련 교사에게 맡겨 어떤 날은 온종일 교련 수업만 한 기억이 있을 정도였다. 핑계 같지만 정말 공부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봄 행군 훈련이었다. 소풍이 아니라 1, 2 ,3 학년 전체가 교련복을 입고 3학년 1반은 실제 M1 소총을, 그리고 나머지 학생들은 목총을 ‘우로 어깨총’ 자세로 장기면 하봉리(현재 장군면)에 있는 충렬사를 참배하고 왔다. 거의 30여 리가 되는 먼 거리를 물 한 병 없이 행군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충렬사는 조선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운 유형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참배가 끝나면 도시락을 먹고 현지에서 해산하였다. 목총은 포수처럼 어깨에 메고 쉬며 쉬며 학교로 돌아왔다. 발바닥은 이미 물집이 잡혔다. 행군할 때 공주 시내 사람이 구경을 하였는데 한 아주머니 말이 생각난다. ‘저렇게 많은 아들들이 있는데 왜 나는 아들이 없을까’ 아마도 아들이 없었나 보다.
체력 측정을 하고 예비고사 보러 대전으로 전날 후배들의 환송을 뒤로 출발했다. 그럭저럭 시험을 보고 귀교했다. 그때부터는 본고사 준비에 열중했다. 국어는 고문으로 한시와 첨 접하는 시가와 수필, 영어는 대학의 영어교재 나오는 유명한 단편소설과 수필 등을 공부했다. 당시에는 야간 자율학습이 없어서 나는 독서실로 향해 새벽 네 시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어느 날 구 공주박물관의 고갯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데 방범대원과 경찰 한 명한테 붙잡혔다. 내 허리띠를 빼앗아 내 손목을 묶고는 금강파출소까지 끌려갔다. 왜 그러냐는 내 물음에 내가 지나갈 즈음 구멍가게가 털렸는데 날 보고 망을 봤다며 공범이라고 했다. 한사코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온다는 내 대답에 파출소 직원들이 수군수군하더니 풀어줬다. 한마디 미안하단 말도 없이. 당시 경찰과 협업하던 방범대원들의 행태가 그러했다. 국립대는 어찌 보내줄 수 있지만, 사립대는 절대 보내줄 수 없다는 아버지 말씀에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예비고사 결과가 발표되었고 성적이 잘 나오지 못했다. 서울과 충남에 합격해 대학 지원할 자격을 갖추긴 갖추었다. 당시 한 반에 스무 명쯤 예비고사에 합격했다. 떨어진 친구들은 전문학교, 지금의 전문대학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대학 입시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었는데 전기는 전국의 국립대와 서울의 유명 사립대학이, 후기는 사립대학이 차지했다. 전기 국립대를 불합격한 후 학원을 갈 형편이 되지 않았다. 나무를 하고 집안일 도우면서 공부했다. 방송대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렇게 하다가 원치 않는 지방 국립대학에 들어가고 공부하기는 싫고 군대 가기로 하고 전경을 지원하기로 했다. 일반상식과 법제대의 과목의 시험과 체력 측정이 있었는데 합격을 해 영장이 나왔다. 입대를 앞두고 서울의 한 직업소개소에 갔다.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들어간 곳이 명동 골목의 커다란 한식당이었다. 주방에만 스무 명 정도의 직원이 있고, 홀 역시 스무 명 정도의 아가씨들이 서빙을 담당하고 있는 대단히 큰 규모의 식당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옷을 벗어 주방 안에 있는 서랍장에 옷을 넣었다. 그리고 비닐 앞치마와 장화를 주며 ‘아라이 통’으로 가라고 했다. ‘아라이(あらい)’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내게 식기 닦는 개수대로 손짓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어로 씻는다는 단어였다.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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