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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고택나들이⑫]독립운동의 산실일우一宇김한종의사 생가지

충남시대 2021. 9. 2. 17:40

김한종의사金漢鍾義士생가지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였던 김한종의사가 태어난 곳이며, 독립운동을 도모하던 곳이다. 1996. 11.30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3호로 지정되었으며, 넓이는 약 1,018이다. 사랑채와 안채 두 채의 초가집이다.

김한종의사는 1883114일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70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21821일 대구 형무소에서 일제에 의해 사형집행으로 순국했으니 올해(2021)가 순국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김한종의사는 독립운동가로 의병장 민종식의 휘하에서 소모관으로 활약한 김재정의사의 아들로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9002, 홍주의병에 참가한 부친 김재정의사를 도와 홍주의병에 참가했으며, 1915년 박상진 등과 함께 대구에서 무장독립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다. 광복회는 1916년 노백린, 김좌진, 등을 규합하여 대한광복단으로 개칭, 김한종의사가 전라·충청지부장으로 임명되어 각지의 부호들로부터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자금을 거두었다.

19167월 조선총독이 부여를 사찰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조선총독을 처단하려는 것이 발각돼 경북 풍기로 피신해 채기중, 박상진의사와 함께 대한 광복회를 만들었고 군자금을 모아 만주에 무관학교를 세워 국권을 되찾고 친일세력을 응징해 나라를 되찾고자 했다.

대한광복회가 국내의 소자산가들에게 고시문을 발송할 때 고시문에 날인할 인장을 직접 새겨 김한종의사에게 전달한 김재풍의사는 김한종의사의 삼촌으로 한 집안에 세 분의 의사가 탄생한 셈이다.

김한종의사가 태어난 1880년대에는 조선이 처음으로 외국에 문호를 개방해 새로운 서양 문물이 급격하게 밀려오던 때였다. 일본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1895820일에는 명성왕후를 시해했다. 19051117일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부친인 김재정의사가 홍주의병에 참가하면서 청년이 된 김한종의사 역시 부친을 도와 참가하게 되었으며 당시 이 마을의 김재정의사 일가 및 아홉 분의 제자들이 의병활동을 했다.

 

김한종의사기념관

생가 옆에 독립운동가 일우 김한종의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김한종의사기념관은 나라사랑과 애국정신을 되새기고 후손들에게 자존과 긍지를 심어주는 교육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 건립되었다. [구성] 건축가인 김경식 관장은 독립운동가 김한종의 정신과 기개를 느끼게 하기 위해 직접 감옥의 이미지를 담도록 설계하였다. 또한 김한종의 강직함을 현대로 끌어 오기 위한 요소를 배치하는 등 당시의 시대상황과 국민들의 심정을 느끼고 되새길 수 있도록 하였으며, 2007112일 개관하였다.

기념관은 광복관, 정려관, 일우관, 모현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복관에는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의 활동상 및 동지들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정려관에는 김한종 가문의 아홉 명의 독립운동가와 두 효자의 효행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일우관에는 김한종의 친필 서한 및 판결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모현관에는 김한종 의사 순국기념비 및 유적지를 건립한 예산모현사업회의 활동상 및 학생들의 체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2층의 전통문화체험학습장에서는 학생들의 체험작품 및 체험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김한종의사기념관은 20144월 개관 10여 년 만에 새롭게 단장하였다.

대리석으로 만든 육각형 모양의 공적비가 눈에 띈다. 내부에 있는 공적비에는 신흥리 마을 열 분(예산군 신양면의 한 분 포함) 의사義士의 공적을 기록하였고, 외부엔 김한종의사의 옥중편지와 어록을 기록하였다.

독립운동가 일우 김한종의사의 애국애족정신을 계승하는 김한종 문화제가 2008년부터 매년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