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시대에 연재를 시작한『잔아일기』는 내가 부산중학교 3학년 때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이전의 생은 어떤 생이었을까? 간단히 정리해 보면 한마디로 출생부터가 안갯속처럼 아리송했다. 진짜 출생지와 호적상의 출생지가 다른, 그 묘한 팔자를 이제야 자세히 밝힐 참이다.
충남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 새뜸 부락과 충남 서천군 마산면 시선리 탑시 부락의 경계선 언덕에는 500년 묵은 정자나무가 서 있는데 그 고목은 내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정의 상관물(相關物)인 셈이었다. 사물패의 풍물소리가 구성지고 그네 타는 여인네들의 웃음소리가 자자했던 그 느티나무 그늘에 누워 잎새 사이사이로 얼비치는 햇살을 바라보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처럼 신비감마저 느껴지곤 했다.
정자나무 언덕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기슭에는 각성바지 7 가구가 모여 사는데 그중 서 씨네 집 마당가에 붙어있는 움막에서 내가 태어났다고 한다. 단칸방인 그 움막은 서천군 한산에서 갓 이사 온 부모님이 새 집을 지을 동안 임시로 거처한 곳이었다. 내가 3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움막 앞에 새로 지은 큼직한 겹집에서 고고한 울음을 날리며 태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서 씨네가 곡간으로 쓰던 그 움막에서 태어난 탓에 나는 고향이 두 군데로 쪼개졌다. 요컨대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 현주소(주민등록지)는 아직 서천군 한산면이어서 내 본적이 한산면 동지리(토산)로 등재되었다는 말이다.
“네가 태어난 거이 남의 집 움막이니께니 아버지가 현주소를 옮기지 못했다 이거디?”
내 고교동창 허마두의 말이었다. 내가 항상 이름이 더럽다고 놀려주는 허마두는 자칭 철학자다. 육이오 때 아버지를 따라 월남한 그는 대학 진학도 포기한 채 부산 국제시장에서 노점상으로 나이를 먹어오다가 요즘은 내가 운영하는 잔아박물관에서 정원사로 지내고 있다.
“기럼 죽어서 어드메에 묻힐 게가? 부여겐? 서천이겐?”
“어디에 묻힐지는 아직 모르겠다만, 두 군데에 묻힐 순 없잖니? 어쩜 엉뚱한 곳에 묻힐지도 몰라.”
“엉뚱한 곳이 어드메가?”
“지금 양평 문호리에 살고 있잖아.”
“하긴 네놈도 네 아버님처럼 역마살이 꼈으니께니.....”
그렇다. 아버지도 역마살이 껴서 콩밭을 매다가 남사당패를 따라간 적이 있고, 형제들이 사는 한산의 들대(평야지대)를 떠나 땔감이 풍부하다는 핑계로 두메산골에 숨어든 것이다.
“네놈이 태어난 움막이 작금도 남아있네?”
“움막은 우리가 새집으로 이사하자마자 서 씨네가 헐어서 채전으로 개량했어. 그런데 재밌는 건 움막에서의 추억 한 토막이 아직도 선명하게 살아있다는 거야. 그 움막 벽에는 얇은 손가방 하나가 걸려있고, 가방 속에는 곰팡이가 파랗게 낀 시루떡 한쪽이 들어있었는데, 그 상한 떡과 가방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거든. 그리고 내가 네댓 살 때쯤일까? 아랫목에 엎드려 소나무를 그리던 모습이 생생한데 그 집이 바로 움막 앞에 새로 지은 4칸짜리 겹집이었어. 그 후로도 아버지는 현주소를 한산에 그냥 두셨고 내 출생지를 정정하지도 않았던 모양이야.”
“기래서 고향이 두 군데가? 재밋구나야! 기렇다면 어드러케 부산중학에 다닌게가?”
“그 내막을 설명하기 전에 국민학교(초등학교) 입학과정부터 꺼내야겠다. 지금은 행정구역 별로 관할 초등학교에 입학하지만 그 당시에는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다닐 수 있었어. 그래서 나는 부여 땅에 거주하면서도 서천군 마산면에 있는 지산초등학교에 다녔던 거야. 함석지붕에 교실이 2개뿐인 데다 선생님은 교장을 포함하여 다섯 분이었어. 그중 한 명은 여선생인데 예쁘장한 처녀였지. 교무실은 손바닥만한데 바닥이 마루가 아니고 흙바닥이었어. 겨울철에는 난로에 태울 딸감이 없어 4, 5, 6학년 학생들을 산으로 내몰았는데 빈손으로 오면 교장선생이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리곤 했지. 나는 친구들과 뱀을 잡아서 땅꾼(뱀장수)에게 판 돈으로 장작개비를 사 왔거든. 어떤 학생은 남의 집 울타리를 몰래 뜯어왔다가 주인영감이 교장을 찾아와 화내는 경우도 있었지.” (훗날 그 당시의 추억담을「솔가지」란 제목으로 동화를 썼다.)
나는 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도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내 딱한 처지를 알게 된 이동순 담임선생이 아버지를 찾아와 잔아는 재능이 아까우니 꼭 가르쳐야 한다고 권유했다. 아버지는 고심 끝에 아들 입학금을 장만하려고 몇 달 동안 산에서 솔가지를 솎아내 말렸다. 그 솔가지 단을 지게에 지고 삼십 리가 넘는 한산장에 내다 팔아 이듬해 나를 한산중학교에 입학시켰다. 하지만 등록금을 계속 댈 수 없어 겨우 2학년 말에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포기한 나는 나무 팔아 돈을 모으기로 작정하고 매일 산에서 솔가지를 솎아냈다. 그러던 어느 날 잔솔 밑동을 낫으로 치다가 다리 정강이를 찍었다. 뼈가 하얗게 드러날 정도였다. 나는 칡넝쿨로 다리를 칭칭 동여매 지혈을 시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당장 내 지재를 부숴버리고 입산을 금지시켰다. 그날 밤 아버지는 내게 등을 돌린 채 한마디를 던졌다.
“차라리 집을 나가거라!”
아버지는 내 정강이 상처에 옥도정기와 갑오징어 뼈가루를 발라 치료를 서둘렀다. 한 달쯤 지나 상처가 아물자 나는 출가를 서둘렀다. 어머니는 내 출가를 반대했지만 아버지는 외아들을 나무꾼 만들 수 없다며 출가를 재촉했다. 내가 집을 떠나기 전날 밤 아버지는 몇 마디를 당부했다.
“대도시로 나가되 할 일이 생기면 눈치 보지 말고 열심히 하거라. 그래야 신용을 얻는다. 남의 물건은 지푸라기도 만지지 말고, 함부로 친구를 사귀지 말거라. 사귈 친구는 오래오래 겪어본 후에 마음을 주도록 하거라. 아무리 친해도 절대 돈은 빌려주지 말고, 빌리지도 말거라.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는 아예 상종을 말거라. 네 할아버지가 친구 빚보증을 서주는 바람에 우리 집안이 거덜났니라.”
날이 새자 아버지는 내 안주머니에 푼돈을 넣어주시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는 떠나는 외아들을 차마 바라보지 못한 채 눈물만 흘렸다.
다음은 출가 당시의 참담한 실상을 장편소설『능수엄마』에서 발췌한 부분인데, 부산이 고향인 공군 동기생이 먼 훗날 자기네 세차장 직원들과 함께 나를 환영하는 회식자리에서 꺼낸 말이다
..... “이 친군 충청도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했지만도 가난해서 진학을 몬한 기라. 이듬해에 입학은 했지만도 졸업을 몬하고 2학년 때 중퇴했으이까네 환장하잖갔나. 부모님 묵인 하에 무작정 대전으로 튔는기야. 쪼맨한 아가 출가했으이 그 심정 어떻겠노. 그란데 대전역서 기차를 탄 거이 하필 하행열찬기야. 상행열차 탔으모 서울로 갔을 거 아이가. 푼돈이 아까버서 차푠들 샀겠나. 차장이 검표하러 다니모 화장실로 튀고 의자 밑에 숨었지러. 그래갖고 새벽에 초량역에서 내렸는데, 느그들 초량역 알제?”
“알고 말고예. 철거된 지 얼마나 됐다고 모르겠능교. 부산진역캉 초량역이 우리들 아지트 아녔능교.”
“아지트라? 박군 느그들 게서 머 했노?”
“뻔하잖응교.”
“뻔하다? 느그들 게서 소매치기했나? 소매치기 맞제?”
“도둑질은 아이오.”
“그라믄 앵벌이가?”
“퍼뜩 얘기나 계속 하이소.”
“초량역에 내려갖고 배가 고프이까네 구내매점에 있는 먹을 거를 보며 침만 삼켰능기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뎅캉 김밥을 보이까네 환장할 거 아이가. 그때 쥔아줌씨가 야를 불러갖고, 늬 배고프제? 어데서 왔노? 충청도서 왔다카이 아줌씨가 야를 착하게 봤는기야. 그래갖고 야를 자기 동생집에 맡겼능기라. 그래갖고 고교 선생이던 쥔이 야를 부산중학교에 넣었능기야. 느그들 알제? 부산중학이 부산서 일류 중학교 아이가. 그 바람에 서울 용산고등학교에 진학한기라. 용산고는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와 대한민국 4대 공립 아이가. 멍청도 촌놈이 부산중, 용산고를 다녔으이까네 멋진 팔자제.”
“그래갖고 우찌 됐능교?”
“그래갖고 가난해서 대학은 몬 가고 공군에 입대해가 상병으로 의가사제대한 후에 나한테 왔능기야. 그래갖고 우리 깔치가 모다논 월급으로 수정동 산동네에 방 한 칸을 얻었지러. 그래갖고 내가 운전하는 수송대 찦차에서 휘발유를 빼내갖고 야를 먹여 살렸능기라, 그걸 은혜니 머니 했싸며 고마워하는 기라. 지금은 야가 어떤 처진고 하이,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개성보쌈을 시작해가 세계적으로 소문난 춘천옥 사장인 기라. 느그들 알제? 서울 구로공단 5 거리에 있는 보쌈 막국수 전문집? 종업원 수가 40명이 넘으이까네 한국 최고 식당 아이가.”
1992. 1. 13
김주연 숙명여대 교수, 김원일, 김원우와 모처럼 술을 마셨다. 기독교 열성 신도인 김 교수는 유머감각이 예민하다. 그는 서울고교 출신인데 박영만과 김광옥의 소식을 물었더니 놀라며 세상사의 인연을 말한다. 두 사람은 내가 4대공립고생들로 조직한 청진회 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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