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을 거부한 사르트르
1992. 9. 12
추석 전 일주일 동안 카자흐스탄 공화국 알마아타에서 화가 및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미하일이 내 서초동 사무실에서 한 달 가까이 묵다가 떠났다. 한국문단에 대해서,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니 소련에서도 묵묵히 작품만 쓰는 사람이 있고 떠벌이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는 내 작품을 러시아어로 번역하겠다며「잔인한 단풍」과「그리고 말씀하시길」을 가져갔다. 그는 내게 소련 유학을 권했다.
오랜만에 영채를 만나 한강고수부지에 다녀왔다.
1992. 9. 13
옛날에 읽었던 <세계문학전집>에서 실존철학의 창시자 격인 장폴 사르트르 편을 뽑아냈다. 노벨문학상과 레종 드뇌르 훈장을 거부한 그의 까다로운 사상적 견해에 호감이 끌렸던 것이다.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이유로는 노벨위원회의 평가 기준이 자신의 의도에 어긋날 뿐 아니라 선정 방식도 브르주아 사회의 습성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1960년도에 읽어본 사르트르의 장편소설『구토』에는 내가 밑줄 친 부분이 어지럽게 깔려있다. 내 고교3학년 시절이 어지러웠듯이.
낙관적 휴머니즘이랄까? 나는 얼마나 값싼 인정에 빠져있었던가! 철저히 삶의 의미를 잃어보자. 철저히 내 가치를 버려보자. 사르트르적 속한(俗漢)이 되지 말자. 그리하여 깨끗하게 나를 무의미한 존재로 남겨보자. 그런 나를 보며 그것 자체를 내 존재가치로 여겨보자.
영채의 전화가 녹음되어 있다.
1992. 9. 18
대학로(마로니에 거리)에 있는 문예진흥원 강당이 축하객으로 꽉 메워졌다. 제5회 만우(박영준) 문학상 시상식장이다. 작년에 상을 받으라고 연락 온 것을 거절했는데 또 거절하면 실례일 성싶어 타기로 허락했던 것이다. 나는 등단 경력이 10년 미만이어서 본상 대신 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금년 현대문학에 발표한 「보이지 않는 시계」가 심사 작품이었다. 좋은 평을 들은 데다 전국에서 92년도에 발표된 모든 중단편 중에서 최우수 작품으로 뽑힌 작품이다.
단상에는 수상자인 나와 김영희 작가 말고도 곽종원 한국공연윤리위원장(전 건국대 총장), 문덕수 국제 펜클럽회장, 황명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심사위원장인 성균관대 윤병로 교수, 전규태 평론가 등이 자리했다.
나는 단상 마이크 앞에서 수상 소감을 간단히 말했다.
“자세한 수상 소감은 출간될 책머리에 씌어져 있고..... 저는 이십대 중반부터 습작을 시작했지만 20년 동안 남의 다리를 긁다가 4년 전부터야 쓰기 시작했다..... ”
여기저기서 꽃다발이 들어와 가슴에 안겨주었다. 피로연이 끝나자 ‘산적’에서 2차로 술판이 벌어지고 서초동 우리 집에서 김승옥, 이근배 등과 3차를 벌였다.
1992. 9. 19
만우(박영준) 문학상에 대한 뉴스가 방송과 신문에 나갔다며 여기저기서 축하전화가 쇄도했다.
1992. 10. 2
서초동 거주 문인 모임인 ‘남사당패’에 두 번째로 참석했다. 오세영, 유안진, 김용성, 박나연, 김형영, 조장환, 이동하, 현길언, 임영조, 박이도 이인순, 신세훈, 그리고 이경철 기자 등이 모였다.
<중앙일보>에 ‘남사당패’에 대한 기사가 크게 실렸다.
1992. 10. 4
중국 연변에서 온 임원춘 씨 여동생인 임영옥이 오늘부터 서초동 내 사무실에서 묵게 되었다. 그녀는 판소리를 배우기 위해 왔다. 임원춘 씨는 내가 중국에 갔을 때 사귀게 되어 형동생으로 지내온 터였다.
1992. 10. 5
반찬숙 아나운서(훗날 국회의원)가 전화부터 걸고 찾아왔다. 그녀는 요즘 괴로운 일이 있나 보았다. 심지어 죽고 싶다는 말도 했다. 대학교수인 남편에게서 정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끼 있는 여자의 공통점일 것이다.
1992. 10. 11
양평 서후리 집에서 아내와 처음 지냈다. 밝은 달빛과 개울물 소리가 몸을 맑게 씻겨주었다.
잠이 든 것도 같고 깬 것도 같다. 산인 듯싶고 구름인 듯싶다. 따스한 가을볕인 듯싶고 부서지는 바람인 듯싶다. 내가 나비라도 된 걸까? 여기가 고향땅 함박산 기슭이라면, 월명산 기슭이라면, 부모님이 살아계시다면.....
1992. 10. 15
서후리로 짐을 꾸려왔다. 책상, 침대, 소파, 냉장고 등 대충 필요한 것만 챙겨 왔다. 막다른 산협 마을 끝자락에 지은 개울가 남향집이다. 뒤란에는 잣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동녘골 능선이 한눈에 보이는 집.
1992. 11. 2
아내와 서후리 집에서 저녁을 해 먹고, 나는 <현대문학>에서 청탁해 온 김영현에 대한 인물평을 쓰고, 전등불을 끄고 촛불을 켜놓았다.
1992. 12. 3
아내 수니가 시를 쓰고 있다. 아내의 문학성이 사랑스럽다. 수니의 공부를 위해 환경을 마련해 줘야겠다.
태호는 시골을 좋아하고 유라는 도시를 좋아한다.
1992. 12. 10
유라의 입적(入籍)을 위해 아내의 원적을 떼러 함께 춘성군 동면사무소에 다녀오는 길에 춘천 이외수 작가 집에 들렀다. 이외수 부부가 미리 대문 앞에 나와 있다가 반갑게 맞아들였다. 웅덩이가 있는 마당을 지나 거실에 들어서니 상이 거실 복판에 놓여 있고 가정용 노래방 앰프가 켜진 채 상 위에 놓여있었다. 아마 노래 연습을 하던 중이었을 것이다. 몇 마디 인사말이 오가고 담배를 피우는 동안 이외수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더니 아내에게 다가와 마이크를 넘겨주었다. 2층에서 작품을 쓰다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노래를 부른다는데 앰프에는 1500곡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는 내게 누구와 친하냐고 물었다. 별로 친한 사람은 없고 한 동네에 사는 김원일 등과 자주 만나는 편이라고 하자 자기는 서울에 가면 문인을 만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표성흠을 잘 아냐고 물었다. 여행 중에 두어 번 만났다고 했더니 그는 표에게 내 작품「그리고 말씀하시길」을 이야기하며 칭찬을 많이 했다고 한다. 나는 요즘 베스트셀러인 그의『벽오금학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 취향에 맞는 작품이라고 했더니 고맙다며 허리까지 숙인다. 함께 놀다가 헤어질 때 그는 아내 영자 씨와 함께 내 그렌저가 세워진 곳까지 배웅하며 자주 만나자고 했다. 아내는 이외수의 성격에 대해 “체면 차릴 당신이니까 그렇게 인사하지, 다른 사람 같으면 앉은자리에서 어서 집에 가라 했을 거라고.” 실토했다.
아내 친구의 남편과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또 불러보라고 마이크를 맡기는 그의 거침없는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중에도 그의 팬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1992. 12. 16
내 사무실에서 2개월 동안 머물러 있던 연길 임명옥은 대단한 여자다. 그녀는 가무단을 이끌고 왔는데 옥류금을 연주하는 아가씨 미화도 내 집에서 묵게 했다. 미화는 각 신문 방송에 소개될 정도다. 명옥은 늘 나를 동정한다.
“오빠가 불쌍해요. 오빠는 잘 살면서도 누가 돌봐줄 사람이 없어요.” 한다.
1992. 12. 25
드디어 내 첫 소설집 『늰 내 각시더』가 <실천문학>에서 출간되었다. 밤늦게 김영현 주간이 작가 몫의 책을 차에 싣고 왔다. 화제를 일으킨 단편소설「그리고 말씀하시길」은 첫머리에 실렸다.
“반응이 대단할 거예요.”
김영현 주간의 말이었다. 그는 요즘 소설『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발표해서 회제를 모으고 있다.
1992. 12. 26
온종일 아내, 지혜와 셋이 증정할 책을 봉투에 넣고 주소와 우편번호를 적고 밀봉했다.
요즘 일본이나 중국 유학 관계로 고민이 크다. 어학 때문에 일본에 갔으면 좋겠는데 별로 내키지 않고, 북경대학은 좋은데 사회주의 국가여서 창작의 환경이 제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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