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중앙 일간지에서 인터뷰 요청
1993. 1. 1
온종일 <한국일보>에서 청탁한 꽁트(13매)를 썼다.
모든 걸 버리고 글만 써야겠다.
밤에는 처가 식구들을 불러 춘천옥 운영에 대해 의논했다. 처제 순애한테 맡길 참인데 제대로 운영할지 걱정이다. 순애는 형부와 함께 고생해 온, 자식보다 더 귀중한 가족이다.
1993. 1. 2
김승옥 소설가와 둘이 압구정동에 있는 영진호텔 커피숍에 갔다. 일본에서 온 김정숙 씨와 만나기 위함인데 구주에 있는 그녀에게 내 유학 문제를 알아달라고 청했던 것이다. 셋이서 오후 5시까지 백제와 일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 헤어지고 나는 김승옥과 양식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박나연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흥분한 목소리다. 내 작품에서 질투심을 느낀다는 게 첫마디였다. 그녀는 현재 한국 시단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여류 시인이다.
“너무 극찬이라 그대로 말하면 거짓말 같을까 봐 말을 못 하겠어요.”
“도대체 누가 뭐랬는데?”
“그 사람은 나보고 무조건 김 선생님의 소설집을 읽고 얘기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읽기 시작하고 있어요. 작가의 말 중에서 ‘새엄마를 만들어주마’라는 표현은 최고의 시적 표현이에요. 현재 유명한 작가들보다 훨씬 훌륭한 작품들이래요. 특히 『늰 내 각시더』와 『잔인한 단풍』을 읽어보래요. 이런 작가를 만나서 행복하대요.”
“도대체 누군데?”
“이경철 기자예요. 그래서 <중앙일보>에서 크게 다루겠대요.”
1993. 1. 4
<조선일보> 박해현 기자한테서 인터뷰 요청 전화가 왔다.
내 책을 주기 겸 모처럼 김원일과 그의 집 4층 서재에서 만나 이야기하다가 복집에서 지리를 먹었다.
1993. 1. 7
오늘 손녀딸을 보았다. 나는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며느리를 찾아가 손목을 잡아주었다. “수고했다.”
애비가 된 태호는 흥분상태다. 손자보다는 첫 손녀가 낫지 싶다.
<문화일보>에서 사진을 찍고 신 기자와 인터뷰를 마쳤다. <한국일보>에서도 문학담당 기자와 인터뷰를 마치고 청탁받은 콩트 원고를 주었다.
김주영은 여러 사람들에게 내 <작가의 말>이 일품이라고 자랑했다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칭찬이 대단하다.
1993. 1. 8
<중앙일보> 이경철 기자가 사진기자와 함께 치안본부 정문 앞에서 내 보도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내 긴장을 풀어주려고 말을 시키고 담배를 피우게 했다. 덕수궁 앞 경찰 데모진압차 앞에서도 찍었다.
맥주집에서 간단히 목을 축이며 내 작품세계에 대해 대담했다. 이 기자는 내 중단편들이 모두 장편거리라고 했다.
1993. 1. 9
<스포츠서울> 문학담당 기자에게서 취재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신문사로 가서 사진을 찍고 오랫동안 작품세계를 이야기했다. 문학 담당인 주장환 기자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한국문단은 몇몇 사람이 20년간 울궈먹어서 이제 식상이 되었어요. 다른 문학담당 기자들도 이제 한국문단도 체질을 바꿔야 한다면서 선생님의 작품이 좋은 조건이라고 했죠.”
1993. 1. 10
영채한테서 축전이 왔다. “책 출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처음 사랑을 간직하세요.”
나는 손녀딸을 안고 사진을 찍었다. 며느리는 “아버님을 닮아서 애기의 손가락이 길어요.” 한다. 발목에 끼웠던 꼬리표가 웃겼다. 애기의 주민등록표는 93. 1. 7일.
어제 산모가 퇴원할 때였다. 태호가 애기방에서 나오는 에미에게 “애기를 먼저 할아버지한테 안겨드려.” 한다. 그렇게라도 효도해보고 싶은 자식이 가엾다. 불쌍하게 키운 저게 벌써 애 아빠가 되다니! 나는 손주를 받아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애기 퇴원수속을 마친 아내에게 넘겨주었다. 나는 태호에게 “애기를 엄마한테 먼저 안겨드려라,” 하고 시키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애기를 안고 아내와 함께 내 그렌저 승용차에 탔다. 태호는 운전하고 산모는 옆에 탔다. 옛날에 태호와 유라 때는 가난했지만 이제는 최고급 승용차로 내 새끼를 안고 타는 기분이 옛날과 다르다. 태호와 며느리는 애기를 낳아 할아버지인 나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책 출판 축하전화가 쇄도했다. 유안진 시인, 조병화 시인(현재 안성에 기념관) 등은 직접 카드나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만 50여 통이 넘는다.
1993. 1. 11
저녁때 집에 찾아온 <실천문학> 주간이 이런 말을 했다.
“<창작과비평사> 주관 세미나 행사장에 갔었는데 형님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파다했어요. 저도 놀랄만한 반응이었어요. 형님의 특이한 문장 칭찬이 대단했어요. <한국일보> 서울경찰청 출입기자가 내 책을 사회부 소관으로 다루겠다고 했어요.”
SBS TV에서 내 얼굴과 『늰 내 각시더』에 대한 보도가 나왔다고 한다. 밤에는 오유권 소설가한테서 전화가 왔다. 유호 작가한테서도 칭찬 전화가 왔다. 모두 내가 잘 모르는 유명 문인들이다.
오늘도 여러군데서 전화가 쇄도했다.
1993. 1. 12
오전 10시 30분에 김포공항을 출발한 KAL기는 12시 30분에 나리타공항에 도착했다. 일행 33명은 모두 명월관에서 식사 후 시인인 일본문학학교 교장 및 학생들과 교류를 갖고 숙소인 올림픽청소년 회관으로 향했다.
1993. 1. 13
일본 민예관, 일본 근대문학관, 일본근대문학박물관을 관람하고 동경대학본교를 방문했다.
일본의 근대문학 100년은 유럽문학의 영향을 받은 시기이며 사상적으로는 혼돈의 시대였다.
문학은 정치를 이겨야 한다. 정치를 넘어설 수 있는 문학이 정치나 사상적으로 강하다. 일본에는 정치가 없다.
- 재일 한인 김석범 소설가의 말
이튿날에는 동경 교외에 있는 고려촌(高麗村)을 탐방하고 고려 도래인(渡來人) 유적지를 살펴보았다. 그들은 남계(男系)로 현재 59대라고 한다.
처음 한일회담이 시작될 무렵에는 일본 모든 박물관에서 수탈한 도자기를 숨겼다가 회담이 끝나자 도로 꺼내 전시했다는 말을 들었다.
호텔에서 이호철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귀국 즉시 책을 드릴 겸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자 대뜸 당신과의 인연은 끝이라며 화를 냈다. ”임헌영에게 해설을 맞겨?“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시면 저도 선생님과 의절하겠습니다.”
그동안 서로의 집에서 함께 자고 다닐 정도로 정다웠고, 심지어 캄캄한 밤중에 둘이 동해안 영진 바닷가 공동묘지에 모셔진 우리 아버지 산소에서 소주병 하나를 놓고 절을 올린 후 어깨동무한 채 사진까지 찍을 정도였는데, 또 제자들 앞에서 만날 나를 칭찬하며 친목회 ‘서울소나무’ 회장직을 맡아달라고 당부하시던 분이 S대 상대 출신 아부꾼에 빠져 하루아침에 나를 멀리했던 것이다.
(그 후 여러 사람이 찾아와 선생님 만나기를 권했지만 끝까지 거절하다가 6년 세월이 흐른 후에야 친목회 총무가 찾아와 가슴 아픈 말을 하는 바람에 마음을 돌렸다.)
“선생님이 형님을 보고 싶다며 눈자위를 붉히셨어요.”
그 말에 가슴이 울컥한 나는 새해 초하룻날 아침에 불광동에 있는 선생님 댁을 찾아갔다. 아파트 문을 열자 제자들 30여 명의 구두가 현관에 그들먹했다. 신발을 벗기도 전에 내 모습을 본 선생님이 달려와 내 어깨를 덥석 껴안았다. 나도 함께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선생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 제자들이 맏형인 내게 박수를 보냈다.
1993. 1. 15
일본에서 서초동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아내가 받았는데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왔다며 흥분된 목소리다. <한겨레신문>과 <세계일보>에서도 인터뷰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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