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은 잔아(김용만)의 해
1993. 1. 28
호텔식으로 아침을 먹고 갠지스강 보트 관광에 나섰다. 나는 보트에 앉아 강변을 바라보았다. 이미 시신을 태우는 연기가 강변을 뒤덮다시피 했다. 손으로 강물을 휘저어보았다. 여기까지 시신을 씻은 땟물이 배어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불결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시신도 이 강물에 씻기고 싶었다. 기왕이면 강 상류에서 내 몸 하나만 씻기고 싶다.
아니, 내 시신도 저들처럼 강가 탁류에서 씻겨볼까?
장작개비로 시신을 태우는 화장장을 둘러볼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신이 드나드는 골목길을 답사하고 유적지를 관람할 때도 그런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오후 7시에 출발하는 야간특급열차를 타고 바라나시를 출발하여 칼카타로 향했다. 이튿날 아침 6시경에야 칼카타에 도착하여 타고르하우스를 관람했다. 장서가 꽂힌 서가를 살펴보았다. 가슴이 뛰었다. 내 원초적인 욕망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죽일 수 없는 욕망이었다. 시간에 쫓겨 노벨상 수상작인「키탄자리」는 찾아보지 못한 채 서재를 나와 정원을 둘러보았다.
버스를 타고 자이나교 사원을 답사했다. 건장한 남성의 나체조형이 시야를 압도했다. 신의 표상인 링가(산스크리트어의 남자 성기)가 우람차보였다. 생명의 시원이랄까?
붓다와 동시대인이었던 바르다마나의 가르침에서 연유된 자이나교(Jainism)는 고대 인도에서 제사 중심의 베다브라마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발생되어 아직까지 존속하는 인도의 종교이며 철학이다.
영국의 지배시대에 축조된 윌리암요새와 빅토리아기념관 등을 관람하고 호텔에 들었다.
1993. 1. 30
mission of charity 본부를 방문하고 나고다 모스크 등을 관광 후 항공편으로 봄베이로 향했다. 2시간 반 후에 봄베이에 도착하여 호텔에 들었다.
1993. 1. 31
호텔식으로 조식을 마치고 관광에 나섰다. 먼저 칸헤리 동굴과 해발 1500M의 검은산에 올랐다. 동굴 산 계곡에서는 기도소리가 들려왔다. 봄베이 시내를 관광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또 참상을 목격했다. 비교적 현대도시를 이루고 있는, 인도에서 가장 세련된 도시 봄배이에도 거지 소굴보다 못한 하층민의 참상은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제발 정부에서 천막 1개씩이라도 나누어줄 일이지.
봄베이 바닷가 호텔 창가에서 석양이 번지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흐린 물이지만 역시 감회를 안겨주는 바다. 나는 그 바다를 보며 진리포구의 바다를 떠올려보았다. 석식 후에는 호텔 라운지에서 일행과 술을 마시며 바다의 야경을 구경하다가 침실로 돌아가 TV를 틀었다.
1993. 2. 1
아침 일찍 룸메이트인 김주영과 함께 바닷가로 나갔다. 나중에는 한승원, 김원일도 합류했다. 바닷가에는 요새의 흔적이 폐허로 남아 있는데 우리는 그 무너진 담 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순진한 사람이 아냐.”
김주영의 말이었다. 한승원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작품이 말해줘. 몸 건강하고 열심히 쓰기만 하쇼.”
김원일은 내게 “말을 놓는 것이 미안해.”라고 사과했다. 나는 친밀감이 들어 좋다며 그의 민망한 심정을 풀어주었다.
봄베이 기차역에서였다. 구걸하는 어린이 수십 명이 주위를 감쌌다. 그중에는 한쪽 발이 부채처럼 얇게 늘린 애도 있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평생 구걸로 사는 게 훨씬 나은데 동정심을 유발시키려고 부모가 애기 때부터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비참한 참상에서 문학이 뭐가 필요하며 지성과 사상이 뭐가 필요하겠는가. 저토록 참담한 모습을 보라! 저 순진한 눈망울에 고인 눈물을 보라! 인간에게 운명이 지워진 가장 죄악스러운 것. 아! 나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 눈물은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혐오일지도 모른다. 세계는 아직도 혁명이 필요하다. 락슈미사원에 가는 지하도 입구에서 나뭇잎을 정성 들여 다듬는 노인에게 40루피를 손에 쥐어주었다. 그 노인에게서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나는 밤중에 몰래 거지 움막 같은 천민의 거처를 구경했다. 어이없는 참상이었다. 65%의 문맹률에 65%가 하루에 한 끼로 지탱한다는 불가촉천민의 참상! 하지만 그들은 내세의 부귀를 믿는 신앙심에 우리처럼 분기를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종교라고 하는 무서운 마취제에 취한 탓이다. 몇몇 재벌은 자식 결혼식에 수백억을 물 쓰듯 하는데 아무 불평 없이 그들이 베푸는(?) 음식만을 고마워한다니!
1993. 2. 7
인도에 다녀와서 3, 4일 동안은 무척 바빴다. 김남주 시인이 자신의 시집 상하 2권을 들고 서초동 집에 찾아왔는데 나와 함께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이끌어가자고 부탁했다. 고맙지만 나는 양평으로 떠날 참이어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맺힌 창작에 올인하고 싶었다.
<한국일보>, <한겨레신문>, <일간스포츠>, <서울신문>의 <퀸(queen)> 여성지와 인터뷰하고 평론가 김명인, 김영현과 만나고, 전화받고 소설 쓰기에 바빴다. 임헌영은 그의 평론집 『우리시대의 소설읽기』에 잔아(김용만)론을 썼다.
오늘은 <한겨레신문>, <한국일보>, <세계일보>에서 크게 보도되었다. <주간조선>에서도 인터뷰 요청이 왔다. <조선일보>에서는 문학담당 박 기자와 인터뷰까지 마쳤는데도 보도가 취소되고 그 대신 인터뷰 내용을 <주간조선>에서 다루기로 했단다. 그 이유를 박 기자가 내게 말해주었지만 입 밖에 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여기저기서 “1993년은 김용만의 해”라고 떠들어댔다. 늦깎이 작가가 창작집 한 권을 내고 이처럼 시끄럽기는 처음이라고 한다.
1993. 2. 9
<조선일보>에서 신춘문예 시상식이 있어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작가이며 영화평론가인 김종원 작가가 나를 보고 “아주 신문마다 도배를 했습디다” 한다.
김주영 김원일이 보는 앞에서 영채가 나에게만 악수를 청한다. 그녀와 주영 형은 잘 아는 사이였다.
1993. 2. 11
저녁때 영채 여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언니가 보고 싶다고 전화하랬어요. 전화해 주세요.”
나는 곧장 세브란스병원으로 달렸다. 그동안 한 번 가볼 참이었다. 더구나 여동생 말에 내일 떠나기로 한 소련 여행마저 취소했다니, 아무래도 심상찮은 상태인 것 같았다.
10층에 있는 병실에 들어가니 엄마랑 가족들이 자리를 피해준다. 안옥희는 화장을 한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내가 조용히 손을 잡아주자 “천재는 아무 때고 빛을 발하기 마련이에요.” 한다. 내 인기에 대한 말이었다. 주사기를 꼽고 누웠다 일어난 그녀가 피곤해하자 나는 그녀를 곱게 안아 뉘었다. 그녀의 얼굴에 편안한 감동이 스며들었다.
병실을 나와 복도에서 여동생과 이야기 도중에야 암인 걸 알았다. “암이에요. 벌서 몸에 퍼졌대요.” 하지만 영채는 아직 모르는 눈치였다.
“창자에 생살이 돋아났는데 그걸 제거하면 된대요. 한 삼 개월쯤 입원하면 된대요.”
영채의 말이었다.
1993. 2. 15
남부경찰서장(이윤조) 실에서 내 문학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를 나눈 후 서장과 과장들을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춘천옥으로 왔다. 경무과장, 경비과장, 형사과장, 수사과장, 정보과장, 방범과장, 교통과장 등 모두가 참석했다.
오늘 아침 8시 40분 KBS 라디오 대담프로에서 이숙영 아나운서와 전화로 생방송을 했다. 청소년에 대한 나의 삶을 조명해 달라는 프로였다.
지난번에는 교통방송에서 전화대담이 있었다.
오늘도 여러 군데서 전화가 왔다.
방송 때마다 춘천옥을 꺼냈더라면 선전효과가 크겠지만 아나운서가 내 생활상을 물어도 일부러 춘천옥을 숨겼다.
영진 씨 집에서 인도여행팀이 만나 사진을 교환하고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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