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69회)

충남시대 2025. 5. 27. 14:05

링가(Linga)와 요니(Yoni)의 결합체인 맷돌


1993. 1. 19

  오늘은 <세계일보>에서 사진을 찍고 인터뷰에 응했다.
  4시에는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술판에서 임재걸 문화부장이 나를 세워 소개하며 노래를 시켰다. 여기저기서 『늰 내각시더』를 외치며 박수쳤다. 숙명여대 김주연 교수가 가장 크게 소리쳤다. 내 옆에는 서울대 조남현 교수와 이문열 소설가가 앉아 있었는데 이문열 소설가도 즐거운 표정으로 나를 추켜세웠다.

  매일 배달되는 여러 편지와 엽서 중에 유일하게 용고동창 이정실의 편지도 들어 있었다. 그는 전화에서도 “어떤 대중소설보다 네 작품을 읽으니 쪽쪽 빨려든다”고 흥분했다. 나는 이정실에게 “네가 문학 평론가가 돼.”라고 했다. 통할 수 있는 동창이 있어 다행이었다. 김철환도 탈랜트인 그의 아내 태현실(영화배우. <여로>의 주인공)이 내 작품을 읽고 감탄했다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1993. 1. 20

  <중앙일보>에 톱으로 크게 보도되었다. 문화면 반쪽 넘게 차지한 기사는 제목이 “제도, 이념보다 소중한 인간”으로 쓰여있고, 사진은 그동안의 작가 사진과는 달리 처음 크게 보도했다고 한다. 김주영 작가도 내 사진에 대해 “신문을 펼쳐보니 문화면이 시꺼멓게, 확.....” 하고 말했다.
  암튼 이 기자의 흥분한 마음이 그대로 반영된 보도였다. 그가 나를 그처럼 추켜세워준 것은 요즘 유행하는 허위의식적 주지주의(主知主義)에 대한 반동으로 내 글을 높여준 인상이 깊었다. 그가 용기 있는 기자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작가의 말에서「죄와 야비」가 솔직한 이미지를 심어준 모양이었다.

  온종일 전화받기에 바빴다. 전혀 알지 못하는 <관동대학교> 엄창석 학장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특히 작가의 말에서 「죄와 야비」가 가슴을 쳤다고 말했다. 심지어 광산김씨 종친회에서까지 전화가 왔는데 『광산김씨 가족』에 사진과 글을 싣겠다고 한다.
  박나연 시인의 말이 걸작이다.
  “잔아 선생님은 휴머니즘 제조기예요. 만약 선생님이 인도에 사신다면 카스트제도를 비방하다 칼 맞아 죽을 거예요.”

1993. 1. 22

  오늘부터 12일간의 인도여행이 시작되었다. 동행자는 김화영 고려대 불문학 교수, 김주영, 김원일, 이문구(보령시에 기념관), 한승원(한강 아버지), 손춘익 등 12명이다.

  방콕을 경유하여 인도 뉴델리에 도착하자 곧장 ASHOKA 호텔에 투숙했다.
  
1993. 1. 23

  온종일 인디아 게이트, 래드포트, 간디 묘소, 큐타브마나르, 락슈미 사원 등을 관람했다.
  국립 델리대학교에서는 힌두교의 중심적 종교시설인 맷돌을 관람했다.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링가(Linga)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요니(Yoni)의 결합체인 맷돌(다산성의 상징)에서 흘러내린 하얀 액체(정액)가 아주 리얼하고 충격적이다. 현장수업하는 학생들의 정서 역시 힌두교의 교리에 묻힐 것을 생각하니 오히려 엄숙함마저 느껴졌다.

1993. 1. 24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난 일행은 뉴델리에서 소형 버스를 타고 자이푸르(Jaipur)를 향해 달렸다. 봄베이까지 뻗은 고속도로지만 노면이 거칠고 차선도 없는 2차선이어서 6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동안 주 경계를 통과할 때는 30분가량이나 소비되고 차가 막히고 사람이 무단으로 길을 건너는 바람에 지체할 때가 허다했다. 겨울철 건조기라고는 하지만 메마르고 삭막한 평야와 초가집들이 도저히 사람 살 집이라고 부를 수 없다. 닭집이랄까, 게다가 부러진 삭정이를 주어거두는 아낙네의 가녀린 몸, 거기에는 연약한 삶이 묻어있었다. 8억 인구의 40% 이상이 무직이라지만 눈으로 보기에는 무직자가 훨씬 많아 보였다.

  중간 기착지인 엠바에서 내려 4명씩 낙타를 타고 포트에 올랐다. 경치가 아름다웠다. 돌산 꼭대기에 쌓은 웅장한 성벽과 섬세한 건축물이 호화롭다. 누구의 말처럼 역사란 한두 사람의 영화를 위한 뭇 대중의 비참한 희생일까? 특히 내실의 유리벽 등 그 호화로움은 환상적인데 얼마나 많은 서민이 죽어갔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모기떼처럼 달라붙는 거지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자 삶에 대한 의욕마저 삭아진다.
  나는 휴게소에서 고물 한 개를 샀다. 자이푸르에는 현지 시간 3시경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관광에 나셨다. 자이푸르는 1700년경에 자이프시왕이 세웠다고 한다. 엠바포트, 하와마할, 시청 등을 관광한 후 왕궁과 옷 파는 가게와 문이 닫힌 시장 골목을 걷다가 늦게야 호텔에 돌아와 무희들의 춤을 관람하며 식사했다. 양고기 불고기가 맛있었다.

1993. 1. 25

  소형 버스를 타고 자이푸르를 출발하여 파테프르 씨크리를 관광하고 아그라에 도착했다. 인도 최고의 이슬람 건축물 타지마할과 아그라포트를 세밀히 둘러보았다. 자무나강가에 위치한 타지마할은 궁전 형식의 묘지로 무굴제국 황제였던 샤 자한의 왕비 뭄타즈 마할을 추모하여 세워졌는데 1983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그라에 도착하기 전, 버스로 이동 중에 들른 마을에 정차했을 때 몰려드는 주민들과 사진을 찍고 또 누추한 장면을 찍는데 젊은 청년 하나가 손으로 촬영을 막았다. 심지가 굳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게 인도의 정신일지 모른다. 다음 기착지인 MAHUWA에서 재떨이 등 토속품을 샀다. 아그라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TAJMAHAL궁을 관광했다. 아그라는 인구 50만에 회교도가 80%나 되며, 타즈마할은 16세기에 지은 무갈왕의 황후 무덤이다. 10루피를 주고 덧신을 사 신고 침침한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후래쉬를 받아 들고 또 10루피를 주었다. 모든 것이 팁이다. 호텔에 들면 꼭 투숙객이 있을 때 침대 시트 등을 만지작거리다가 팁을 받아나간다. 안 줄 수가 없었다. 멍하니 서있기 때문이다. 깐디는 동냥을 주는 것도 범죄라고 말했지만 그 어구낭창한 현실을 보고 그냥 돌아설 수 있겠는가. 끝까지 달라붙는 그 가여운 어린 손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1993. 1. 26

  아그라를 출발하여 카주라호에 도착했다. 온종일 원색적인 수많은 까마슈트라 조각으로 장식된 사원들을 관람했다. 적나라한 성행위의 체위를 묘사한 수많은 조각에서 오히려 엄숙한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인간의 본능인 성욕을 신앙의 대상으로 승화시킨 그 지혜에서 사유(思惟)의 비화(祕話)를 실감한다.

1993. 1. 26

  아그라를 출발한 기차는 1시간 반을 달려 11시경에 짤시에 도착했다. 아그라 역에서 본 참상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발이 기형아인 칠팔 세 됨직한 애가 구두닦이 형과 역내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내가 동생에게 5루피를 주고 가이드인 미스 진이 자기 몫의 도시락을 주자 그걸 가지고 한쪽 구석에서 음식을 챙겼다. 그때 다른 어른 거지가 시샘을 내자 어린 동생은 쇠파이프를 들었다.

  짤시에서는 버스로 카주라호까지 6시간 넘게 달려서 호텔에 도착했다. 여장을 풀기 전에 조각사원을 관광했는데, 밤에 2인승 리어카를 타고 시내를 관광하는 재미가 새로웠다. 자그마한 마을에서 리어카를 타고 한적한 거리를 달리는 기분. 인디안 토박이 집을 구경하고 별빛이 찬란한 밤거리를 달리는 낭만. 하늘이 낮아 보였다.

  단체사진을 찍고 도저히 그냥 돌아설 수 없어 2루피짜리 지폐 두어 잎씩을 나누어주었다. 수줍게 접근해 오는 쇠가죽처럼 거친 손과 발! 내가 인도에 와서 산다면 관습에 저항하다 정말 칼 맞아 죽을 것이다. 휴머니즘이란 어휘 말고는 다른 말은 사용할 줄 모를 테니 말이다. 이런 참담한 나라에 돈 많은 사람들은 돈을 주체하지 못하고 황금으로 변기를 만들고 자식들 결혼식을 위해 수백억을 쓴다니!

1993. 1. 27

  항공편으로 카주라호를 출발하여 1시간쯤 비행 끝에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사르나스 박물관 등을 관람한 후 일찍 호텔에 들었다. 밤에는 야경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갠지스강가에서의 장작으로 시신을 태워 강물에 뿌리는 화장모습이 잠을 뒤척여주었다.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