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81회)

충남시대 2025. 8. 5. 18:48

  김일성 주석 심근경색으로 사망

 

1994. 4. 9

 

  저녁 먹고 자유시간이다. 8시부터 9시가지 자기소개, 9시부터 10시가지 교양강좌 시간이다. 나는 시간을 때우려고 혼자 냇가 커피숍에서 쥬스를 마시고 나오니 2학년 학생장이 어둠 속에서 나를 찾고 있었다.

  “선생님, 한 시간 동안 찾았어요.

  그러니까 자기소개 시간을 생략하고 두 시간을 내 강의 시간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오붓한 분위기였다. 강의시간 절반은 끼와 한()에 대해서, 나머지는 소설작법을 쉽게 풀어서 이야기 식으로 엮어나갔다. 박수가 요란했다.

 

  준비해간『인간의 시간』50권을 나눠주고 자리를 뜨려했는데 오락회가 열리고 노래를 지목당하는 바람에 ‘돌아와요 부산항’을 불렀다. 재창을 받았지만 사양했다.

  이어서 캠프화이어 시간인데 마당에 운집한 학생들 전체가 “잔아! 전아!”를 연호하는 중에 학생장이 나를 가운데로 끌고나가 디스코를 추게 시켰다. 박수가 요란하고 어느 남학생은 등 뒤에서 나를 꼭 껴안고 “1학기는 놀고 2학기부터는 선생님을 못살게 따라다닐 거에요.” 한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까를 생각해보았다.

 

1994. 4. 13

 

  중앙일보 이 기자와 요즘 한창 시끄러운 최인훈 소설가의『화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건 소설이 아니에요. 한 달 뒤쯤 평이 나오면 솔직하게 쓰겠어요.

 

1994. 4. 16

 

  문호리에 거주하는 조규원 사장을 찾아가 주택 진입로 문제를 부탁했다. 경기고와 서울법대를 나온 그는 듣던 대로 좋은 사람이었다. 꼭 인감을 떼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마감 날자가 다가오는 데도 아무 소식이 없어 면사무소 산업계장을 찾아가 걱정하니 “벌써 지주가 찾아와 인감도장을 찍어줘서 서류가 갖춰졌어요.” 한다. 정말 어이없는 감동이다. 나는 즉시 진입로에 낀 36평 땅값을 후하게 쳐서 다시 찾아갔더니 “글 쓰신다고 해서 편의를 봐드린 건데 무슨 땅값이냐.”며 돈봉투를 받지 않는다. 나는 뭘로 은혜를 보답할지 고민이다. 남들이라면 그런 경우 평당 20만원인데도 20 30배로 우려먹는다는데 8백만 원 돈을 안 받다니! 나는 아내와 사은의 대책을 모색해보았다.

 

 

  아내는 요즘 고려학원에 열심히 나가고 있다. 수학을 제쳐두고 대신 다른 과목을 열심히 하겠단다.

 

1994. 4. 17

 

  아내가 시민회관에서 열린 시화전에 참가했다. 황금찬 시인, 박두진 시인, 조병화 시인이 참가했단다. 아내에게 공부를 시켜야겠다.

 

1994. 4. 26

 

   시학(詩學)시간에 학과장이『보봐리 부인』저자를 학생들에게 물었다. 아무도 대답을 못하자 나한테 물었다. 플로베르라고 대답은 했지만 아찔했다. 기억력이 없는데 만약 못 맞혔으면 어찌할 건가.

   “교실에서 나한테 다시는 그런 질문 하지 마.

   학과장 연구실에서 내가 한 말이다. 그는 내 위신을 세워주려고 그랬다는 거다. 고맙기는 하지만 모르는 걸 물었으면 애들 앞에서 무슨 꼴이냐고 했다.

 

  교수들은 거의 내 이름을 빼고 출석을 부른다. 그런데 한 명만 꼭 나를 호명한다. 그걸로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는 모양이다.

 

1994. 5. 10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넬슨 만델라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지난 5 6일에는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해저 터널이 완공되었다.

 

  명지대 철학교수는 내가 용고 출신인 걸 알고 내 동창인 우승용(문화일보 논설위원), 우석호(SBS 국장)와 친하다고 한다. 그는 경복고를 나와 중앙일보에 근무했는데, 자기를 교수라고 부르지 말라고 겸손을 떤다.

 

 

1994. 5. 24

 

  학생들이 내 생일을 축하한다며 야단이다. 개중에는 꽃을 주는 학생도 있다. 생일을 잊고 살아온 내가 이상해서 어떻게 생일을 알았느냐고 믈었더니 복도와 각 교실에 적혀 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나고 교수들과 술 한잔 하기로 했다. 학생들도 예닐곱 명이 동석했다. 술집에서 학생들이 케익을 사다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준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생일잔치다. 2차로 모두 노래방에 가서 함께 노래 부르고 축하를 받았다.

 

1994. 5. 30

 

  <문이당> 임 사장이 나와 이 기자를 요정으로 데려갔다. 아가씨들이 곁에 앉아 수발한다. 경찰생활 때 말고는 모처럼 가보는 요정이다. 내 옆에 앉아있는 아가씨가 제법 문학에 대해 알고 있다. 심지어 돈을 주고 시로 등단한다는 말까지 한다. 그만큼 문단이 썩었다.

  임 사장은 어서 원고를 다듬어달라고 한다.

 

1994. 5. 31

 

  <스포츠서울> 박 기자를 만나 원고를 줬다.

 

  갑자기 마곡사 은적암에서 고생하시던 아버지 생각이 난다. 겟세마네 교회에서 흘린 눈물도 아버지와 예수의 동일시현상에서 생긴 휴머니즘의 폭발인 셈이었다. 아버지 생각에 울고 또 울었다.

 

1994. 6. 5

 

  3일 전에만 해도 찔레꽃 향기가 계곡에 향수를 뿌린 듯했는데 오늘은 더 짙은 향기가 풍긴다. 무슨 향일까?

  나를 미치게 하는 저 동녘골의 풍경! 바로 저 하늘과 산과 달이 이다.

 

  이무근 서울대 교수한테서 전화가 왔다. 먼저 찬이 엄마가 전하고 남편한테 바꿔준다. <큰그릇> 동문지에 실린 내 칼럼을 읽었다며, 바로 전화했지만 통화가 안 되었다고 한다.

 

1994. 6. 11

 

  TV로 영화 <엘 시드>를 감상했다. 3시간 반 동안에 1. 2부를 봤는데 내 몸을 긴장시키는 영화다.  

 

  “죽기 전에 큰 걸 써봐야겠는데....
 

1994. 6. 20

 

  국어시험을 치르는데 임 교수가 내 책상에 와서 이름만 써놓고 나가시라고 한다. 나는 다른 학과에서도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이미 전공을 습득한 분인데.....” 교수들의 말이었다.  

 

1994. 7. 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주석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신문 참조)

 

1994. 8. 25

 

  드디어 내 장편소설『인간의 시간이 문이당에서 출간되었다.  표지가 좋다. 나는 책 제목에서 시간을 흐름의 개념이 아닌, 공기처럼 우주에 만연하고, 정지되어 있는 개념으로 여기고 그 널려 있는 시간을 내가 선택해 가진 의미로 해석했다.

  제목을 놓고 출판사와 보름 동안 씨름하다 내 생각대로『인간의 시간으로 정했다. <문이당>에서는 처음에 1만부를 찍었는데 사운을 걸었다고 한다. (보통 1500부나 많아야 3000부를 찍음) 임 사장은 신이 나서 대도시 도매점에서 매일 청구한 책 부수를 프린트해 보내주었다.

 

1994. 8. 28

 

  중앙일보 정명진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해왔다.『인간의 시간』을 문학담당이 아닌 출판담당이 크게 다루기로 했단다.

  인터뷰와 사진을 찍고 점심에는 문화부 부장을 비롯한 전 부원과 함께 등심집에서 점심을 들었다. 그런데 식대를 신문사 측에서 미리 지불했다.

 

1994. 8. 29

 

  <현대문학>에 단편「팔라니트를 넘겼다. 10월호에 실린다고 한다. 영채가 이야기한 자기 친구와의 체험담을 내가 작품으로 정리했다. 제목 팔라니트는 이집트 나일강 유역에 서식하는 커다란 보라색 꽃나무인데 내가 지은 이름이다.

  작품 첫머리에 “이 소설을 죽은 영채에게 바친다. 그녀는 훌륭한 연기자였다.” 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