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꺼내본 호칭
어제 치른 전쟁은 두 달 만에 터진 육박전이었다. 이번에는 아내가 칼 대신 유리컵을 던지는 전쟁이어서 피해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밤까지 연장전을 치르는 바람에 늦은 아침인데도 아내가 일어나지 않아 걱정이었다. 침실에 들어가 조바심을 내도 이불자락 밖으로 비어져나온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발가락질로 반응을 나타낸 아내의 그 말 없는 투쟁이 마치 애기의 발장난 같아 귀여워 보였다.
“여보, 어서 일어나 정원에 번진 햇살을 봐요.”
“여보라뇨?”
드디어 아내가 입을 열었다.
“아내를 여보라고 부르면 어때서?”
“딴 여자한테나 여보라고 불러.”
“당신한테 여보라고 부르면 안 돼?”
“아이고, 오글거려라.”
“왜 오글거리는데?”
“됐다! 40년 만에 불러준 호칭이라 여보 소리가 생뚱맞거든. 그러니 지금까지 불러온 대로 딸 이름을 쓰도록 해. 은영아 은영아 하고 날 부르는 소리가 당신 목소리 중에서 가장 쓸만하니까.”
“고년이 에미 편만 드는 년이라 은영 대신 여보로 바꾸고 싶었는데....” “그럼 왜 여태까지 딸 이름을 사용했지?”
“어렸을 때는 고년이 예뻤으니까 그랬지. 한두 살 때는 오죽 예뻤어야 내복 속에다 끌어안고 다녔을까. 캥거루처럼.”
“호칭 바꾸지 마.”
“왜?”
“여보는 싫다고 했잖아.”
“고년 팔아치우길 잘했지. 지금까지 노처녀로 한집에 살면 만날 불란이 터졌을 거라구. 마누라를 예뻐하게 된 것도 고년을 팔아치운 덕이야. 우리 둘만 오붓이 사니까 당신의 참된 가치를 발견한 거지. 우리 앞으로는 싸우지 말고 재밌게 살자구.”
“약은수 쓰지 마. 그런 말로 꼬신다고 내 맘이 풀어질까봐?”
“당신 목소리에 웃음기가 젖어있는데?”
“웃음기 좋아하네. 분노 어린 목소리에 무슨 웃음기야?”
“양심을 속이지 마. 지금 속으로는 웃고 있어. 물론 마음 한 구석에는 분노가 남아 있겠지. 하지만 분노 어린 웃음이 진짜 웃음이라구. 사랑도 증오 어린 사랑이 아름답거든. 행복한 사랑이 진짜 사랑이겠어? 그건 너무 싱거운 사랑이야. 고통스런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구.”
“어쭈! 그런 말재간으로 사기나 치지 그랬수? 편히 먹고 살게.”
“혀는 정직해야 잘 돌아가거든. 사기성이 농후한 혀는 허점을 보이게 마련이지.”
“그래서, 그 정직한 말재간으로 안미라를 꼬셨나?”
“내가 꼬신 게 아니고 안미라가 꼬셨다고 몇 번이나 말해. 나는 당신 찾아 구만 리를 헤맨 사람이라구.”
“무슨 구만 리야. 구십 리도 안 될 텐데.”
“사랑을 찾아 헤맨 거리는 얼마든지 부풀려도 좋아. 심리적 거리니까. 당신이 사십년 동안 나와 살면서 몇 번이나 집을 나갔는지 알아?”
“그걸 기억해둔 사내도 있나? 좀스럽게?”
“계산해봤더니 아홉 번이야. 한번 찾아다니는 데에 10000리 길로 치면 90000리가 된다구.”
“오죽해야 나갔을까!”
아내가 한마디를 던지고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이 오래 흘렀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가출 당시의 괴로웠던 심정을 회상하겠지? 하지만 아내는 엉뚱한 말을 꺼냈다.
“서울로 발령 난 당신을 따라갈 때였어요.”
예상 밖의 말에 내 몸이 움찔했다. 아내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버지는 나를 방에 가뒀어요. 그리고 방앗간 종업원인 더벅머리 총각한테 몽둥이를 들려 감시했어요. 나는 총각한테 애원했죠. 그분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내가 없으면 그분은 세상을 버릴지도 모른다. 한 인간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니 제발 눈감아다오. 총각은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풀어줬어요. 그후 더벅머리 총각은 아버지한테 직사하게 혼났다고 해요. 아버지가 총각한테 이런 말을 하셨대요. 철딱서니 없는 계집애 하나 제대로 감시 못한 네놈이 뭔들 야무지게 챙기겠냐. 내가 뭐랬니 이놈아! 그 서울 도둑놈한테 딸을 빼앗기느니 네놈한테 줘버리겠다고 언질을 줬잖아 이놈아! 내가 집을 나온 후 총각은 시름시름 앓다가 약골이 되어 방앗간을 떠났다고 해요.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그 총각과 살았으면 속이 편했을 텐데.”
“히히힛!”
“웃음소리가 왜 그래요?”
“그분에게는 내가 필요해, 그런 감동 어린 추억담을 듣고 보니 사악해진 당신이 묘한 웃음을 자아내게 한 거야.”
“사악해져? 그처럼 흉한 말을 써?”
“농담식으로 표현한 거야. 사십년 전에는 나를 그토록 사랑하던 당신이 이젠 유리컵을 내던질 정도로 사나워진 걸 생각하니.... ”
“왜 말을 돌리는 거지? 히히힛 소리는 분명 나에 대한 비웃음이었어. 칼 들고 설치더니 이젠 그릇 던지기냐? 그런 비웃음이지?”
“억탁부리지 마. 그 웃음소리는 장난이라구. 주방바닥에 생긴 피폭 흔적을 보니 당신을 놀려주고 싶었던 거야.”
그렇다. 웃음을 자아낸 것은 유리컵에 얻어맞은 흉한 흔적이었고, 그 흔적을 보는 순간 아내에게 장난치고 싶었던 것이다.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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