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이 문제라구?
전화를 끊었지만 머리가 멍멍했다. 온 식구들이 발로 나를 짓이기는 기분이었다. 내가 집 가장이 아니라 천사들만 사는 낙원에 몰래 틈입한 악마 같았다. 심지어 홀애비 혼자 키운 아들놈마저 엄마 편을 들고 있으니 기막힐 노릇이었다. 물론 어릴 적부터 아빠보다 엄마를 더 사랑하라고 일러왔지만, 그랬다고 해서 엄마 편을 드는 건 아닐 성싶었다. 엄마의 인품에 끌리는 게 분명했다. 사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처가식구를 대하는 태도가 그전 같지 않았는데, 파리에서 귀국하자마자 호프집으로 불러낸 것도 그 심보를 엿보고 싶어서였다.
“도착지 호텔에서 대기할 때는 뭘 하고 지내는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시내로 볼 일 보러 나갈 때도 있고, 잠자는 시간이 태반이죠.”
박 서방의 대답이 시원찮다. 이삼일 동안 머물면서 잠만 잔다고? 스튜어디스들과 어울릴 게 뻔한데 그따위 대답을 해?
“암튼 가정평화가 젤이야. 네 장모가 나이 들면서 신경질이 좀 늘었지만 내 인생을 걸고 보듬어줄 작정이다.”
“그렇죠. 인생을 거셔야죠. 그만큼 가정이 중요한 거죠.”
이놈 봐라? 비아냥거리는 말투인데 이유가 뭐지? 장인이 바람피운 걸 알고 있나? 아니면 은영에게 불만이 있는 걸까? 차라리 군대에 있도록 놔둘 걸. 현역시절에는 딸네 집에 깨가 쏟아졌는데, 소령 계급장을 달고 전투기를 모는 모습도 멋져보였는데, 충성심이 높으면 부부애도 활활 타오르게 마련인데, 전쟁이 터질 것도 아닌데, 민항기보다 전투기 타는 게 더 보람찰 텐데,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른 모습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던가! 내가 미쳤지. 왜 제대하라고 꼬드겼는지. 내 입을 비틀고 싶다. 이제 내게 자식복은 제로상태다. 아들, 딸, 사위, 모두 필요없다!
그런데 요즘 어이없는 일이 생겼다. 라오스에서 십년 만에 집을 찾아온 태호가 놀라운 말을 했다.
“아버지의 꿈이 문제에요. 식구들을 그 꿈속에 가두려하시니, 그게 탈이죠.”
죽을 때가지 보지 않겠다고 버린 자식인데, 그래서 십년 동안 얼굴도 안 본 자식인데, 지지리 애비 속을 썩이던 놈인데, 돌맹이로 애비 승용차를 박살낸 놈인데, 그런 불쌍놈이 어느새 개과천선했단 말인가. 아빠 손만 잡고 놀던 놈이, 그래서 수니와 연애할 때도 우리 엄마 돼달라고 엉엉 울던 놈이. 이제 나잇값을 하는 걸까? 40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여서 저절로 유전자가 개량된 걸까?
태호가 집을 나가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친구들 꾐에 빠진 탓이었다. “아버지가 존재하는 집을 증오한다!” 태호가 집을 나가면서 책상 위에 적어놓은 메모였다. 나는 식당문을 닫은 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친척집을 뒤지고 다녔다. 홍성 누나네 집을 찾아갔을 때도 인사치례를 무시한 채 먼저 사랑방과 창고부터 뒤졌다.
“뭔 일여? 태호가 또 집을 나간겨?”
“여기에 숨겼나 해서....”
“얘가 지금 뭔 소릴 허능겨? 코빼기두 못 봤는디 감추다니. 으이구, 착헌 에미 만나 착허게 클 줄 알었는디 워째서 자꾸 도망을 친댜? 허기야 에미가 아무리 잘해줘두 계모 슬하는 편찮을 거구먼?”
“그게 뭔 소리야? 계모라니? 누나 눈에는 수니가 계모로 보여? 응? 왜 그따위 생각을 하지? 누가 뭐래도 수니는 태호 친에미야. 알겠어? 말 조심해!”
“아니, 내가 에미 미워서 허는 말잉감? 이쁜 건 이쁜 거구 계모는 계모다 그 말인디? 상추를 아무리 정성들여 가꾼다 혀두 배추가 되겠능감? 세상 이치가 그런 걸 워째서 누나를 원망허능겨?”
“원망이 아니고 누나 말이 괘씸해서 그래. 말이 괘씸하면 마음도 그럴거라구.”
“그게 원망 아니구 뭐여? 그려두 나는 동생을 태산처럼 여겼는디 워쩌자구 속을 박박 긁어대는 거여?”
“알았어. 하지만 동생 속 타는 것도 생각해줘야지.”
“허긴 그려, 늬 말이 옳아. 이 속 빠진 누나가 동생 속도 모르구.... 으이구, 그 육시헐 태호놈 땜에 동생허구 의날 뻔 혔구먼. 징그러운놈!”
“놔둬. 이제 놔둘 수밖에 없어. 도둑놈이 되든 깡패가 되든 제놈이 알아서 하겠지.”
“그려서 옛말씀이 맞는겨. 무자식 상팔자라구.”
“그래도 누나 자식들은 반듯하게 컸잖아.”
“늬가 몰라서 허는 소리여. 그것들두 모다 웬수덩어링게.”
누나의 웃는 모습을 보니 자식들이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은영 에미 속을 썪힌 게 어끄제 같은디, 너 인제사 정신 채렸나벼. 아암, 세상천지에 은영 에미 같은 여자 읎응게 그리 알어.”
“시끄럿! 누나가 내 맘을 어찌 안다고 그래.”
“그렁게, 은영 에미가 속을 썩인다, 그거여?”
“아냐. 아무 것도 아냐. 그럼, 잘 있어.”
“벌써 떠날라구? 서울까정 갈 틴디 저녁 먹구 떠나. 참외두 깎아먹구.”
“올 때마다 먹고가라, 자고가라, 그 소리 정말 지겨워.”
“얼래, 하나뿐인 동생잉게 저절루 나온 소린디 지겹다구?”
“그렇게 막말해야 어서 쫓아낼 것 아냐.”
“얘 좀 봐. 그걸 말이라구 혀? 옆집서 들을까봐 겁난다.”
“참, 옆집 면장 딸 잘 있어? 과부 티가 전혀 안 나던데?”
“저런 육시헐 인간, 말허능 것 좀 봐. 아직두 속을 못 채렸구먼? 도대체 너는 누구 핏줄을 타구낭거여?”
“나도 몰라. 맘이 왜 항상 허한지. 정말 내 핏줄에 하자가 있나 봐.”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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