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에 벼락부자가 되다
미아리 산동네에서 시작한 수니와의 동거생활은 정말 거지꼴이었다. 공무원직 사표를 내던진 후로 열 가지 직업을 전전할 만큼 내 팔자는 기구했다. 아니, 일부러 기구한 팔자를 만든 셈이었다. 사표를 내던진 것부터가 어이없는 짓이었다. 공무원이란 신분보장 속에 갇혀 산다는 게 지루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젊었을 때 옷을 벗자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모험심이 수니와 나를 거지꼴로 만들었다.
퇴직 후 맨 먼저 시작한 일은 자동차 도색이었다. 하지만 기술이 없어 무시당하기 십상이었다. 군대 친구가 경영하는 세차장에서 차를 닦기로 했다. 그런데 친구가 밀수 범법자여서 헤어지고 공사판 잡부로 일했다. 봉천동으로 이사한 후에는 리어카 배추장사, 화장품 외판원, 보신제 외판원, 라디오 외판원 등등을 거쳐 아내와 리어카 포장마차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봉천동 개울가에서 포장마차를 시작하고 반년쯤 지나서였다. 신사 한 분이 우리 부부의 가여운 모습을 보고 보쌈장사를 권했다. 개성 출신인 그 노신사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보쌈 솜씨를 떠올리며 요리법을 설명해주었다. 소금에 저린 배춧잎 사이에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 속을 넣고 주먹처럼 말은 보쌈김치에, 돼지고기를 삶아 곁들인 메뉴였다. 디지털단지 오거리(옛 구로공단 오거리)리에 8평짜리 가게를 얻어놓고 아내와 둘이 실험을 거듭했다. 수니는 음식 솜씨가 별로지만 맛을 보는 데는 천부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음식이든 맛만 봐도 레시피를 속속들이 분석할 정도였다. 하지만 보지도 듣지도 못한 한국 최초의 보쌈집을 차렸으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보쌈과 앙상블 메뉴인 춘천막국수야 수니의 고향 음식이어서 어려울 게 없었다. 옥호인 춘천옥 벽간판 옆에는 페인트로 ‘先酒後麵’(선주후면)을 써 붙였다. 먼저 보쌈안주로 술을 마신 후에 막국수를 들라는 뜻이었다.
개업 날이었다. 음식 맛이 어떨지 조마조마한데 여기저기서 좋은 반응이 나타났다. 4개뿐인 좌석마다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보였다. 최고야, 맛이 기똥차구먼, 입에 쩍쩍 당겨, 손님 끌겠는데, 수니와 나는 그 말이 실감나지 않았다. 개업 이튿날부터는 손님이 줄을 섰다. 하루가 다르게 줄이 길어졌다. 이제 장소가 문제였다. 건물주에게 사정해서 옆 가게를 차례차례 넓히기 시작했다. 일 년도 안 돼 2층 주인집마저 이사시켰다. 세는 달라는 대로 지불했다. 그래도 대기 손님은 줄지 않았다. 옆집과 뒷집, 또 옆집과 뒷집을 사들여도 손님은 계속 늘어났다. 손님 중에는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 연예인, 체육인, 군인의 발길도 이어졌는데 정치인 중에는 정당 총재를 비롯한 원내 대표, 사무총장, 대변인 등이 단골이었다. 경제인 중에도 중소업체 대표는 물론 재벌 총수까지 다양했다. 연예인 중에도 톱스타들이 많았다. 체육인도 국가 대표선수들이 대다수였다. 주변 군부대에서는 사단장을 비롯하여 지휘관 모두가 단골이었다. 유명한 작가나 화가들도 줄을 이었다. 개성 음식이어서 그런지 북한 출신 단골이 많았다. 심지어 미그기를 몰고 남하한 북한 조종사 이웅평 소령도 단골이었다. 임신 중인 아내와 동반했는데 아내가 술을 조심하라고 일렀지만 그는 끝내 술탐을 버리지 않았다.
88올림픽 특정업소로 지정되기도 했다. 외국인 단골도 늘어났다. 특히 일본인들이 보쌈을 좋아했는데 그들 중에는 일본에서 도시락통을 가져와 싸가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 요식업 전문 잡지에 한국 업소로는 유일하게 춘천옥이 실렸다. 소문은 미국과 유럽 등 해외동포 사회에도 파다했다. 내가 뉴욕에 갔을 때였다. 한식집에서 점심을 먹는데 동포 청년 네 명이 들어와 내 옆자리에 앉아 떠들었다. 뉴욕에 보쌈집을 내고 싶은데 춘천옥을 찾아가 사정해보자는 말이었다. 서울시에서 발행하는 해외 홍보 책자에도 춘천옥 화보와 해설이 실렸다. 단골손님 하나는 파리 오를리공항에서 춘천옥이 실린 홍보 책자를 봤노라고 귀띔해주었다. 인기 연속극이던 김수현 작품 <사랑과 야망>을 춘천옥에서 촬영할 때는 구경꾼들이 손님들과 뒤엉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주방 모습을 촬영할 때는 아예 우리 종업원들이 주방식구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서 분점 요청이 쇄도했다. 모 재벌에서는 대형 프로젝트 현장에 분점을 요청하기도 했다. 게다가 어느 방송국에서 특집으로 다루는 바람에 춘천옥 앞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인파로 백절을 쳤다. 심지어 점심 때 고기가 떨어질 정도로 손님이 밀리는 바람에 저녁장사는 아예 문을 닫아야 했다. 다음은 춘천옥 성공담을 다룬 소설『능수엄마』의 종결 부분이다.
“날래 오라우. 큰일 났어야.”
“무슨 일인데 그래?”
“손님들이 춘천옥을 점령했음메.”
“그게 뭔 소리야? 손님이 점령하다니?”
“그 배라먹을 테레비 탓이디.”
그제야 짐작이 갔다. 원래 손님이 밀리는 데다 특집방송을 내보냈으니 오죽하겠는가. 나는 급히 디지털단지 오거리로 차를 몰았다. 춘천옥에 도착하니 현관 앞 도로가 인파로 꽉 차 있었다. 경찰관 두 명이 인파와 차량을 정리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출입문 유리에는 오후 6시에 문을 닫겠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이럴 수가, 6시부터 저녁장사가 시작되는데 문을 닫다니.
“나 부산서 왔으니까네 맛만 보고 갈랍니더.”
“나 광주서 왔응께 한 접시만 싸주쇼 잉?”
“나 대전서 왔는디 늦어두 꼭 먹구갈팅게 그리 알어유.”
“내래 고향이 개성이니께니 박대하디 말기오.”
손님들의 아우성이었다. 나는 당장 문을 열라고 지배인에게 고함쳤다. 내 고교동창생인 지배인은 이런 말로 항의했다.
“비행기 타구서리 날래 항정살 사오라메.”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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