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샹그릴라』이야기 Ⅱ
그런 대화를 꿈꿔온 내 재미를 상상해보라. 초라한 죽음만이 쾌락을 유발시킬 수 있다. 가상세계와 우주시대를 지향하는 21세기에 공동묘지에서 산역꾼 2명만이 시신을 묻는 그 쓸쓸한 낭만을 상상해보라. 그러고 보니 영정사진을 들고 있을 사람이 하나 더 필요했다. 그 일이라면 아무래도 아내가 무방할 것 같았다. 평생 함께 살아온 사람이니 그만한 일쯤 맡긴들 어떠랴 싶다.
소설『샹그릴라』에는 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저승에서 필봉이 염라대왕과 나눈 이야긴데, 필봉의 거침없는 말투에 쏠쏠한 재미를 느낀 염라대왕이 그를 곁에 머물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그럼 소설에서 재미있는 장면을 골라 읽어보기로 하자.
.... 필봉은 염라대왕에게 이승에서 바람피운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생전에 제가 아내 속을 어지간히 썩였거든요.”
“아내 속을 안 썩인 사내도 있나?”
염라대왕의 맞장구에 으쓱해진 필봉은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어느 정도야죠.”
“그 어느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어서 이실직고하게.”
염라대왕은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필봉의 말을 재촉했다.
“제 나이 환갑 무렵이었습니다. 아내와 오래 살다보니 너무 지루했습니다. 아내도 지루해서 몸을 비틀 정도였죠. 제가 싱싱할 때만 해도 아내는 일심동체가 되어 만족하게 지냈지만 환갑을 넘으니 저와의 동침을 꺼리는 데다 삼시세끼를 차려주는 수고를 지겨워했습니다. 게다가 남은 세월마저 빨래에, 청소에, 잔소리에 시달려야 되고, 가사도우미를 둬봤자 되레 시어머니처럼 모셔야 될 판이니 아예 헤어져 살자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졸혼(卒婚)이란 것이 아내의 그런 날갯짓을 부추긴 셈이죠. 그래서 우리 부부는 이틀이 멀다하고 티격태격 싸우게 되었고, 차츰 싸움질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싸울 때는 악이 받혀 세간살이를 부수기까지 했지만 그 싸움이 지루한 일상생활에 생기를 불어넣는 바람에 가정파탄만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부부싸움이 가정에 파탄을 낸 게 아니라 오히려 파탄을 막았다는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계향이가 나타난 것은 그 무렵이었죠. 아내와 헤어질 수도 없고 함께 살 수도 없는 그런 애매한 시기에 늘씬한 미모의 중년 여성이 나타나자 저는 금방 홀리고 말았습니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겠군.”
“아닙니다. 되레 집안에 꽃이 피었습니다.”
“꽃이 피다니? 자꾸 말이 꼬여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제 아내가 남편 바람피우는 걸 좋아했다는 말입니다.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런 식이었죠.”
“아내가 노린 건 뭐지?”
“제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겠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바로 옆집을 매입해서 두 집 살림을 차렸습니다.”
“아내에게 약올리고 싶어서 옆집에 신접을 차렸나?”
“아닙니다. 계향의 제안이었습니다.”
“이런 요망한 년을 봤나! 그러니까 초반부터 본처를 요절내겠다, 그래서 기선을 잡겠다, 괘씸한 년! 요년을 일찌감치 저승으로 끌어올려 지옥에 던져버리겠네. 자네한테는 미안하지만.”
“대왕님,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계향이는 제 아내 보경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지극정성으로 섬겼습니다. 음식도 보경의 입맛에 맞추고 빨래와 청소까지 도맡는 바람에 보경은 팔자가 늘어질 지경이었죠. 계향은 보경이 개밥 주듯 던져버린 저를 정성껏 건사해주었습니다. 어느 날 계향은 저희 부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골치 아픈 세금도 제가 처리하고 귀찮은 살림도 제가 챙길 테니 두 분은 재밌게만 사세요. 저는 가족도 친척도 없는 외톨이라 재산을 빼낼 곳도 없습니다. 저희 부부는 계향의 말에 귀가 솔깃했습니다. 차츰차츰 생활비를 늘려줬죠. 계향이가 현금을 지니고 있어도 저희 부부는 마음대로 쓸 수 있는데다 세금 납부 같은 귀찮은 일에 신경을 끄고 살아도 무방했죠. 사실입니다. 저와 보경은 세금 고지서라면 딱 질색이었습니다. 재산세, 종합소득세, 부가가치세, 취득세, 등록세, 양도소득세, 임대소득세, 주민세, 자동차세, 전기세, 전화세, 상수도세, 하수도세, 건강보혐료, 산재보험료, 고용보험료, 자동차보험료, 국민연금, 가스요금 등 외우기조차 힘든 공과금 고지서를 보면 소름이 끼쳤습니다. 계향은 여행도 권장했습니다. 국내여행, 해외여행, 오대양 육대주를 실컷 누벼보세요. 이태리 현지식도 먹어보고 세르비아 새끼돼지요리도 먹어보세요. 여름철에는 서늘한 북극권에서 지내시고, 겨울철에는 따스한 멕시코만이나 카리브해에서 지내보세요. 호텔도 특급으로 골라 쓰세요. 물 쓰듯 펑펑 써도 두 분 생전에는 바닥나지 않을 거에요. 그동안 재산 모으느라 고생하셨으니 남은 생은 새처럼 훨훨 날아다니세요. 저와 보경은 즉각 수속을 마쳤습니다. 첫 여행지는 유럽이었죠. 러시아 서부지역과 폴란드 헝가리 체코 크로아티아 등 동유럽을 포함하여 그리스에서 아일랜드와 핀란드까지 전 유럽을 섭렵했습니다. 프랑스 독일 이태리 영국 스페인 덴마크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서부 유럽은 재차 답사하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해외여행에 맛들리고 보니 아예 세계일주를 작정하고 먼 지역부터 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브라질 칠레 페루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등이 속한 남아메리카부터 뒤졌습니다. 다음으로는 이집트 남아공 케냐 모로코 튜니지 카나리아제도 등이 속한 아프리카, 호주 뉴질랜드 파푸아뉴기니 등이 속한 오세아니아, 캐나다 미국 멕시코 쿠바 자메이카 등이 속한 북아메리카,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태국 베트남 네팔 인도 등 30여 개 국이 속한 아시아까지 여행하고 나니 이제는 해외여행마저 소들해졌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밥벌이에 매달릴 때는 그림의 떡으로 보이던 나라들이었죠.”
“계향이 덕을 톡톡히 본 셈이군. 그러니까 애초에 신접을 옆집에 차린 것도 자네 부부를 잘 모시려는 배려였군.”
“그때부터 진짜 재산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재산이동?”
염라대왕은 의아스런 눈으로 필봉을 바라보았다.
“계향이 너무 양심적이고 헌신적이어서 재산관리를 모두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이승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군.”
“네 그렇습니다. 계향의 도량이 넓은 데에 놀랐습니다. 계향은 저희 부부에게 통장을 내밀며 이런 말도 했습니다. 언니와 형부의 즐거운 여생을 위해서 봉사할 따름이죠. 이 통장을 잘 검토해보세요. 통장을 훑어본 저희들은 가슴이 아팠습니다. 계향이가 쓴 돈은 저희 부부가 쓴 액수의 반의 반, 또 반의 반, 또 반의 반, 또 반의 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제 아내가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앞으로는 돈을 맘 놓고 쓰게. 자네가 펑펑 써야 우리도 펑펑 쓸 수 있네. 그랬습니다. 저희들은 계향이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모든 재산관리를 맞긴 것이 오히려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계향이가 보통내기가 아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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