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제 9회 아내 찾아 90000리

충남시대 2022. 8. 17. 11:38

소설『샹그릴라』이야기

장사에 너무 지친 탓일까? 형편이 넉넉해지자 집에서 편안히 누워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1년에 수십억씩 버는 전국에 소문난 식당을 팽개치고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춘천옥은 세를 주고 서초동 건물을 팔아 양평 문호리에 집과 농장을 마련했다. 이사를 마치자 우리 부부는 맨 먼저 방바닥에 지도를 펼쳐놓았다.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을 차례로 훑어볼 참이었다. 승용차를 몰고 동해안의 최북단 포구인 마차진을 시작으로 대진, 거진, 속초, 양양, 주문진, 사천진, 경포대, 정동진, 삼척, 울진을 뒤지기 시작했다. 포구와 항구마다에서는 날마다 생선회를 즐겼다. 남해안과 서해안에서도 바닷가 구석구석을 뒤졌다. 이제는 생선회가 물릴 지경이었다.
  “인간은 고생하며 살라는 팔자야.”
  수니의 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유망한 사업체를 하루아침에 팽개친 것은 돈 욕심이 무른 내 체질 탓이었다. 편히 살 수 있는 재산을 모았으니 더 벌어 무엇하랴, 차라리 남은 세월을 소질대로 살아보자, 그런 욕망이 불끈 치올랐던 것이다. 가난한 시절을 생각하면 수전노가 되는 게 마땅하지만 돈이 복수의 대상일 수는 없었다.

  오늘도 우리 부부는 온종일 집안에서 여유를 즐겼다. 연휴 첫날이어서 남들은 차를 몰고 계곡이나 바닷가를 찾아다녔지만 우리는 수니의 취향대로 소파에 앉아 TV영화를 감상했다. 수니는 사람과 사귀는 걸 꺼려했다. 때문에 집안에서 죽치는 날이 허다했다. 한 달 내내 죽치는 경우도 많았다. 수니의 하루 일과래야 어쩌다 연못가를 거니는 것 말고는 온종일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게 고작이었다. 수니가 좋아하는 프로는 멜로드라마였다. 마침 화면에서는 중년 부부가 서로 몸을 껴안고 야단이었다. 나는 음흉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대담하게 모험을 시도했다. 수니 곁으로 다가앉아 왼팔을 등허리 쪽으로 살살 침투시켰다. 드라마에 홀려 있던 수니가 내 팔을 탁 치며 짜증을 부렸다. 
  “왜 주책을 떨어!”
  “허리 껴안는 걸 주책이라구?”         
  “이런 짓 싫어하는 것 알잖아.”
  또 참아야 했다. 연애시절 말고는 40년 넘게 동거하도록 한 번도 수니의 포옹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왜 이런 말뚝 같은 여자와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정 때문에? 살아가는 데에 편리한 여자라서? 그건 모르겠다. 이번에는 슬그머니 수니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어보았다. 잠잠했다. 괜찮겠지 싶어 조심스레 만지작거렸다.
  “싫다니까 왜 자꾸 만져!”
  수니가 또 짜증을 부렸다.
  “아니, 여기도 못 만지게 해?”
  나도 일부러 화를 내보았다. 그러자 수니는 표정을 바꾸며 살가운 반응을 보였다.
  “하기야 이 정도는 괜찮지....”
  오랜만에 들어보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때다 하고 나는 엄살을 떨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언제 마누라 포옹을 받아볼는지.”  
  “어쭈, 수작부리고 있네. 측은해서 허벅지 정도는 바줬더니.”
  맥이 빠졌다. 허벅지 만지는 걸로 만족할 걸. 내 팔자에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포옹을 탐냈던가! 죽을 때까지 이런 꼴로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수니는 내 참담한 표정을 보고 마음이 풀어졌는지 잠자리에 들 때는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그런데 새벽녘이 되자 잠꼬대를 내질렀다. “야 이년아!” 나는 얼른 애기를 어르듯 수니의 엉덩이를 다독여주었다. 아마 꿈속에서 안미라와 다툰 모양이다. 
  “지금 무슨 꿈을 꿨지?”
  “몰라.”
  “야 이년아! 하고 소리치던데 이년이 누구야?”
  “내가 그랬다구?”
  “응. 잠꼬대가 시끄러웠어.”
  “소리를 친 것 같긴 한데....”
  “안미라가 당신한테 덤벼들었어?”
  “아냐. 송아년이야.”
  “송아? 송아는 잊은 지 오래됐는데?”
  “내 맘에는 송아년이 더 지랄이야. 아주 능글맞은 년이라구. 꿈에서 배실거리며 뭐랬는지 알아? 언니로 잘 모실 테니 봐달라는 거야, 글쎄.”
  “뭘 봐달라는 거지?”
  “뭐는 뭐야. 세컨드로 인정해달라는 거지.”
  “꿈에서 그따위 말을 해? 참 넉살 좋은 년이네.”
  “그러면서 엉뚱한 말을 하는 거야. 소설『샹그릴라』에 웃기는 장면 있지? 우리가 신나게 읽었던 부분.” 
  “세컨드가 본처 자식들을 혼내는 장면?”
  “응. 그걸 그대로 외면서, 저는 언니 자식들에게 재산을 모두 물려줄 거에요. 그러는 거야.”
  “제까짓게 물려줄 재산이 어딨다구?”
  “우리가 모두 죽으면 그런다는 거지.”  
  “기막힌 년이군. 그런 년이어서 일찌감치 끝낸 거라구.” 
  “흥, 장한 일 했구먼.”
  아내는 침대에서 내려와 스위치를 올렸다. 세벽 5시였다. 나는 아내의 기분을 살려주려고 책을 들고와 그 재밌는 장면을 읽어주었다.『샹그릴라』는 소설가 잔아가 쓴 장편소설로 요즘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베스트셀러다.  

 .... 나는 죽어서도 외롭게 묻히고 싶다. 세상에서 내 죽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장의사 인부뿐이어야 한다. 친구, 친척, 형제는 물론 자식들도 내 죽음을 몰라야 한다. 자식들이 내 안부를 물어오면 다음과 같은 절묘한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엄마, 요즘 아버지 심장병 어떠세요?”  
  “네 아버지 돌아가셨다.”
  “뭐라구요? 언제요?”
  “어제.”
  “그런데 왜 연락 안 하셨죠?”
  “나도 몰랐다. 동창회에 나간 사이 돌아가실 줄 누가 알았겠니. 집에 와보니 장의사 인부들이 벌써 염을 끝냈더구나.”
  “아니, 가족 몰래 염을 끝내다뇨?”
  “네 아버지가 미리 예약해뒀던 거야. 비용도 듬뿍 주고. 글쎄 사망진단서까지 떼놨더라구.”
  “사망진단서를 어떻게 미리 떼놔요.”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잖니.” 
  “암튼, 지금 당장 갈게요.”
  “올 것 없다.”
  “네?”
  “어젯밤에 장례 끝냈다. 모든 게 자동이었어. 첨단 기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