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내가 던진 유리컵은 재질이 무거운 크리스탈이었다. 컵 모서리에 찍히지 않아 마루바닥이 깊게 패이진 않았지만 파편이 백린탄(白燐彈)처럼 퍼져나가 일대에 엄청난 살상을 자행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이 쏘아댄 백린탄은 공중에서 1차 폭발하여 사방으로 흩어지면 2차 폭발을 일으켜 근처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는데, 국제협약을 무시한 그 폭탄 투하가 우리 집 주방 마루바닥에 자행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아내의 그릇 투척은 대책이 시급했다. 아내의 그 새로운 전술이 버릇처럼 굳어질 경우 큰일이었다. 칼로 홍송 문짝이나 자개농을 찍은 것은 한 번으로 그쳤지만 그릇 투척은 시시한 부부싸움에도 쉽게 화풀이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어 싹수부터 잘라야 했다.
그런데 어이없는 것은 그 참혹한 피폭자리가 흉하거나 지저분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구를 옮기다 조금만 긁혀도 마루를 새로 깔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잡치는데 아내가 그릇을 던져 낸 상처에서는 귀염기마저 풍겼다.
왜 그럴까? 내가 미쳤나?
아니다. 내가 미친 게 아니고 아내에 대한 깊은 연민과 양심 때문이었다. 부잣집 딸이 가난뱅이 홀애비를 만나 모진 고생을 겪은 데다 남편의 외도 탓에 신경질이 도졌는데 주방바닥을 가시밭으로 만들면 어떻고 쓰레기장으로 만들면 어떤가. 비록 그릇을 의도적으로 던졌다 해도 그 의도적인 행실을 더욱 보듬어주고 싶었다. 어제 발발한 전쟁만 해도 아내의 의도적인 선전포고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을 일으킬 까닭이 전혀 없었다. 전쟁은 고사하고 남의 집 같으면 희희낙락할 경사였다.
어제 점심 무렵이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화장하고 있는(화장대보다 소파를 선호하는) 아내 곁으로 바짝 다가앉은 것은 아내를 웃기려는 술책이었다. 내가 안미라와 상종한 후로는 아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말라버렸다. 어쩌다 웃는 것도 웃는 시늉에 불과했다. 요즘은 웃음의 뿌리가 뽑혔는지 아예 웃는 시늉마저 말라버렸다.
“남편이 곁에서 재롱떠니까 행복하지?”
“지겨워.”
“당신 화장하는 모습이 예뻐죽겠어.”
“웃기지 마.”
“다리가 저리다면서 내가 주물러줄게.”
“내 몸에 손대지 말라니까!”
“손거울 보며 눈화장하는 모습 참 귀엽다.”
“제발 곱게 늙어.”
“마누라 웃기기 참 힘드는군!”
드디어 짜증을 내고 말았다. 그게 화근이었다. 벌떡 일어난 아내가 벼락 치는 소리로 악을 썼다.
“화장 망쳤잖아!”
고함뿐이 아니었다. 크리스탈 컵이 주방바닥에서 작렬했다. 아내의 몸이 언제 소파에서 주방으로 날아갔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나는 후닥닥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십여 분쯤 정원을 거닐다보면 아내가 폭탄 파편을 말끔히 치울 것이었다. 잔디밭을 거닐다가 연못 쪽으로 걸어가 둘레를 돌기 시작했다. 대여섯 바퀴 돌다 보니 서글픈 생각이 들어 옆동네에 사는 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편만 드는 딸이지만 내 답답한 심정을 하소연하고 싶었다.
“목소리가 탁한 걸 보니 또 싸운 모양이지?”
“무슨 말버릇이 그래? 그게 대학원 나온 자식의 말투냐?”
“싸우는 게 지겨워서 그래. 난들 기분 좋겠어?”
“너는 싸웠다는 말만 들어도 지겨운데 만날 싸우며 사는 애비 마음은 오죽하겠니. 위로해주긴커녕 되레 짜증을 내다니, 늬가 그따위라 엄마가 아빠를 얕잡아보는 거라구.”
“내가 어쨌는데?”
“엄마 편만 드니까 더 의기양양하잖아. 객관적인 입장에서 엄마 잘못도 지적해줘야 뉘우칠 텐데.”
“엄마한테는 지금 논리적인 말이 안 통해. 무조건 싹싹 빌어. 내가 뭐랬어, 송아인지 뭔지 그 골치 아픈 여자를 진작 끊으랬잖아.”
“그 여자 끝낸 지가 언젠데 그래. 벌써 오 년이 지났어.”
“또 딴 여자와 상대했다면서?”
“그게 뭔 소리야? 안미라를 말하는 모양인데, 나하곤 아무 상관없는 여자야.”
“변명하지 마. 엄마한테 다 들었어. 그러고도 엄마 편만 든다구? 어이쿠 골치야!”
“목소리 낮춰. 박 서방 들을라.”
“집에 없어. 아침에 뉴욕 갔어.”
“언제 온대?”
“글피.”
“귀국하면 시간 좀 내보라고 해라.”
“뉴욕 다녀오면 곧장 파리로 간다던데, 왜? 급한 일 있어?”
“아냐. 간만에 술 한 잔 하려구.”
“쓸데없이 엄마 얘기 꺼내지 마.”
“미쳤다고 사위한테 장모 흉보래? 암튼 박 서방 건강 챙겨줘. 몸이 삐쩍 말랐더라.”
“직업이 그런 걸 어떡해. 열댓 시간씩 조정석을 지키다 보면 살 안 빠지고 배겨?”
“너도 에미 닮았니? 남편한테 하는 말투가 그게 뭐야?”
“내 말투가 어때서?”
“우아하지 않다 그 말야.”
“아빠한테 물든 탓이지. 옛날에는 엄마 말소리가 얼마나 우아했어. 그런 엄마를 쌈꾼으로 만든 게 누군데.”
“끊어!”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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