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회)

충남시대 2023. 2. 14. 14:12
미친소녀 1

< 시대배경 >


  이 소설은 거의가 실화이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습격사건이 터지자 그해 4월 1일 대전에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고, 그해 10월 30일 ‘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사건’이 터져 연말까지 토벌작전이 계속되었다. 북한 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부대 120여 명이 유격대 활동거점을 구축하려고 울진 해안으로 침투했던 것이다. 토벌작전이 끝나자 북상 중이던 패잔병 1명이 눈보라치는 겨울밤에 밥을 훔쳐 먹으러 산속 외딴집에 숨어들었다가 생포되었는데, 그 무장공비가 대용교도소(代用矯導所)인 강릉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고부터 주인공 동호(정보형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배승태 씨가 내 손을 잡고 이상한 말을 했다. 내레 자수한 기 아니었디, 어드러케 김일성 수령님을 배신하갔어,  그런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1996년경에 쓴 것으로 추정)

 서울에 가서 동호 씨를 찾아야겠다. 헤어진 지 삼십 년이 넘었지만 언제나 그이는 내 남편이다.

(2001년경에 쓴 것으로 추정)

 

  동호는 연주의 수첩에 적힌 메모를 읽으며 두 가지 내용에 놀랐다. 하나는 그녀가 배승태와 인연을 맺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를 남편으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한 남자를 남편이라고 자꾸 의식하다보면 진짜 아내가 되어버리는 일종의 동종주술(同種呪術)에 빠진 현상이 아니었나 싶다.

  평창IC가 다가오고 있었다. 동호는 연주의 수첩을 접어 호주머니에 넣으며 운전 중인 박 기사에게 곧장 달리라고 지시했다. 박 기사는 사장의 뜬금없는 지시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평창 리조트 건설현장에 간다며 서울을 출발한 사장이 아무 설명도 없이 곧장 달리라니.

  “평창 말고 어디에 가시려고요?” 
  “강릉쪽.”
  “무슨 일로요?”
  “누굴 찾아가는 중인데, 삼십사 년 전에 헤어진 사람이지.”
  동호는 자꾸 허튼소리를 지껄이고 싶었다. 그래야 북받치는 감정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반갑다기보다 어쩐지 기분이 묘해지는군. 왜냐면 그자는 말투가 거칠어서 만나기가 조심스러워. 내레 어드러케 살아왔건 기걸 와 묻네? 살이 피둥피둥 찐 걸 보니께니 렛날 강동호가 아니군 기래. 그렇게 시비를 걸어올지 모른단 말야.”
  “뭐 하시는 분인데요?”
  “아주 무서운 총잡이었어. 지금은 늙었겠지만 옛날엔 남한 사람들을 벌벌 떨게한 살인병기였지. 그들은 핵폭탄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구. 자네 적화통일이라는 말 들어봤나?”
  “네.”
  “요즘 북한 핵문제가 시끄럽지만 그거야 사이버게임에 불과할지 몰라. 6자회담이 열릴 만큼 관련국들의 이해가 얽혀 있거든. 하지만 그 총잡이들은 남한 땅 여기저기서 불을 뿜어댔단 말야.”
  “그분이 지금 강릉에 사시나요?”

  “자네 강릉에서 주문진 쪽으로 가본 적 있나?”
  “여러 번 가봤습니다.”
  “그 중간쯤에 사천이란 곳이 있어. 면소재진데 파출소를 지나 삼백여 미터쯤 가면 진리포구 쪽으로 꺾어지는 길이 나타날 거야.”
  “저도 압니다. 그 길로 쭉 내려가 포구에 다다르면 언덕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바로 경포대가 나오죠.”
  “잘 아는군.”
  “친구들과 가끔 다녔어요. 동해안 하면 그 근처가 젤 맘에 들거든요.”
  “진리포구가 맘에 든다구?”
  “경포대는 너무 도시스런데 진리는 시골스러워 좋아요.”
  “하지만 진리포구는 조용한 곳이 못돼.”
  “왜요?”
  “귀신 우는소리가 요란하거든.”
  동호는 얼른 대화를 끊고 창유리를 내려 얼굴에 바람을 쏘였다. 봄바람이 밀려왔다. 박 기사는 귀신 울음소리가 궁금했지만 캐물을 수 없었다. 사연이 깊은 모양이었다. 승용차는 어느새 대관령을 넘는 중이었다. 
  “자네 대관령이 몇 굽이인지 아나?”
  “아흔아홉 구비죠.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뚫렸지만요.”
  “자상한 사람이군. 하지만 내 마음속에 품어온 대관령은 늘 태고의 이끼가 뒤덮인 원시의 고개였어.”

 


각 신문에서 화제의 기사를 이렇게 밝혔다

 

조미료를 안 친 음식의 감동적인 맛을 느낄 만큼 능란한 작품이다. - 조선일보

무장공비와 형사간의 갈등과 화해, 그리고 인연의 드라마를 그렸다. - 중앙일보

이념대립의 시대를 지나 화해를 갈망하는 남북관계의 변화를 묘사했다. - 동아일보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속도감 있는 장면전환은 60대 작가로 믿어지지 않는다. - 한국일보

육중한 소재를 우회적으로 접근하면서 이데올로기의 다면성과 휴머니즘 강조. - 경향신문

일방적으로 굴복하는 것이 아닌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가능한 화해. - 문화일보

북한을 철이 없는 무작위적 타락으로, 남한을 철든 작위적 타락으로 다뤘다. - 서울신문

체험적 요소가 다분한 이 작품은 탄탄한 구성과 이야기 전개가 돋보인다. - 연합뉴스

자수논리와 체포논리에 낀 무장간첩이 30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을 조명했다. - 국민일보

인간의 죄에 대한 동정적 이해와 야비의 폭로가 잔아(김용만)의 문학적 주제. - 한겨레신문

잔아(김용만)의 깔끔한 문장과 경쾌한 장면 전환이 압권이다. - 경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