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30회)

충남시대 2023. 2. 9. 16:15

누가 옥자를 꼬드겼을지 몰라

  “혼자 실컷 다잡으라구. 나는 이미 마음을 다잡았으니까. 못난 사내!”
  “여보, 이러지 말라니까 그러네. 나 정말 미치겠어.”
  “호호호호.... 아무렴 미쳐야죠. 나 몰래 집을 나가 나를 미치게 했으니 당신도 당연히 미쳐야죠. 안 그래요 여보?”
  “입 닥쳐! 네가 미친년이야! 안 미쳤으면 사기치려는 수작이구. 하지만 하필 나한테 사기를 치다니. 그래 나를 괴롭혀서 뭘 노리자는 거지?”
  “여보, 자꾸 왜 이러세요? 이러시면 나 여기서 혀 깨물고 죽을래요. 기어이 나 죽는 꼴 보실래요? 정이나 이 애를 모르쇠로 버티면 경찰서에 가서 따져봐요. 당신 지금 첩년한테 푹 빠지셨군요. 옛날에는 나 하나만 사랑한다고 고백하셨잖아요? 어서 옛날로 돌아가세요. 그러실 거죠?”
  “이봐 옥자, 정말 이러면 안 돼. 옛날에는 마음이 고왔잖아? 인정도 많고? 그러니 제발 정신 차려.”
  “지금도 마음이 고와요. 인정도 많고. 정신도 멀쩡해요. 범수도 당신 닮아서 마음이 곱고요.”
  “죽이 척척 맞는구먼? 둘이서 잘 놀아봐!”
  수니는 몸을 홱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김석이 뒤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방문을 잠가버렸다. 방문을 열라고 사정해도 수니는 “꺼져!” 소리만 내질렀다. 김석은 창호지 문짝에 대고 수니를 설득했다.
  “여보, 당신 이럴 게 아니라 나하고 의논해서 대책을 세워야 해. 지금 우리는 액운에 갇힌 꼴이야. 저 여자 몸에 손도 대지 않았어. 정말야.”
  “기술도 좋네. 몸에 손도 안 대고 임신시키다니!” 
  “여보, 정신 차려. 저 여자는 당신이 이러길 바라고 있어. 이따위 짓을 할 여자가 아닌데 왜 저러는지 캐봐야 해. 그게 급하다구. 당신 화낼 때가 아냐. 오해할 것도 없어.” 
  “누가 저 여자를 꼬드겼을지도 몰라. 공무원 신분에 처녀를 임신시켜놓고 십년 세월 쳐다보지도 않았으니 잘하면 한 몫 챙길 수 있고....”
  “그게 뭔 소리야? 임신시키다니?”
  “증거가 있잖아. 얼굴도 당신을 닮았고. 눈은 아주 빼다박았어.”
  ”자꾸 억탁만 부리지 말고 같이 생각해 보자구. 우리 같은 가난뱅이를 등쳐봤자 몇 푼이나 챙긴다구.”
  “한 몫이 아니면 반에 반몫이라도 챙기겠지.”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내 양심은 깨끗한데?”
  “자신을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색탐은 다르거든.”
  “색탐이라니? 내게 왜 그 더러운 오물을 씌우는 거야?”
  “시끄럿! 은영이 잠 깨!”
  수니의 고함소리에 묻어나온 은영의 이름을 옥자가 물고늘어졌다.
  “은영이가 누구에요? 첩년이 낳은 애죠?”
  “입 닥쳐!”
  김석이 소리치자 옥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범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아들 누구 닮아서 이렇게 잘 생겼지?”
  “아빠 닮아서.”
  “아빠가 누구시지?”
  “저기.”
  범수가 손가락으로 김석을 가리켰다. 
  “아빠 이름은?”
  “김석”
  “어이구 내 새끼, 말도 잘하지.”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산동네에는 이내가 끼기 시작했다. 김석은 할 수 없이 지폐 몇 장을 챙겨 옥자에게 쥐어주며 다음에 찾아오라고 일렀다. 우선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수니의 오해는 밤에 조용히 풀어 줄 수밖에 없었다.  
  옥자가 사라지자 집안에는 적막이 스며들었다. 방안에서는 이따금 은영의 칭얼대는 소리가 들릴 뿐 조용했다. 아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옥자의 말을 믿는 걸까? 아니면 미친년인 걸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기분 나쁜 감정을 표출하는 걸까?
  “제발 문 좀 열어.”
  여전히 반응이 없다. 김석은 점점 화가 치올랐다.
  “문짝을 때려부술 거야.” 
  “부숴.”
  모처럼 수니가 반응을 나타냈다. 억탁이나마 그 반응이 반가웠다. 
  “제발 믿어줘. 눈꼽만치도 변명이 아냐. 제발 미친개한테 물린 셈 치라구. 만약 그 여자 몸을 껴안기만 했어도 당신한테 솔직히 고백하겠어. 하지만 손도 대지 않은 걸 어쩌란 말야.”

  “그만 떠들어. 나 바보 아니거든.”
  “그래. 입 다물 테니 문 좀 열어줘.”
  “못 열어. 밖에 나가 자.”
  “배도 고프고.”
  “사먹으면 되잖아.”
  “당신도 저녁을 먹어야지. 은영이도 밥을 먹여야 되구.”
  “한 끼 굶었다고 죽지 않아.”
  “여보, 생고집 부리지 말고 우리 솔직한 대화를 나누자구.”
  “나중에 나눠.”
  “고마워. 하지만 어서 은영이 밥 줘.”
  “은영이 핑계 대지마. 그 수에 안 넘어가.”
  “수라니? 그게 뭔 소리야?”
  “뭔 소린지 양심은 알 것 아냐?”
  “정말 억탁만 부릴 거야?”
  “억탁? 불 안 땐 굴뚝에서 연기 날 리 있어? 제발 따지지 마! 나 지금 골치 아파!”
  김석은 할 수 없이 시장 쪽으로 내려갔다. 순대국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수니가 좋아하는 덮밥, 오소리감투, 튀김, 그리고 은영이 좋아하는 꽈배기를 한 봉지 사들고 돌아왔다. 어느새 어둠이 짙어진 마당에는 부엌에서 흘러나온 전등불빛이 뿌옇게 깔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