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9회)

충남시대 2023. 1. 17. 10:22

대낮에 날벼락을 맞다

 

  김석이 사표를 낸 것은 은영이 세 살 때인 삼십대 초반이었다. 모험이었다. 고생길을 사서 택한 셈이었다. 10년 동안의 근무 대가로 받은 쥐꼬리만한 퇴직금으로 신림동 길가에 있는 25평짜리 허름한 함석집을 장만했다. 여러 밑바닥생활을 전전하다가 길가 쪽 방 하나를 털어 야채가게를 차렸다. 장사를 시작하고 두어 달쯤 지나서였다.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태호 또래의 남자애를 데리고 찾아와 다짜고짜 김석을 서방님이라고 불렀다. 
  “범수야, 인사드려라. 네 아버지시다.”

  기막힐 노릇이었다.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어딘지 모르게 낯익어 보였다. 처음 파출소 근무를 시작할 초임시절 막걸리집 신풍옥에서 만났던 옥자가 틀림없었다. 직원들과 가끔 들렀던 신풍옥에는 네댓 명의 색시가 기거했지만 장사가 소들해지자 모두 영등포로 나가고 지금은 옥자 혼자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매춘단속이 있을 때마다 자기를 돌봐준 김석을 극진히 대해주었다. 
  태호가 태어난 날이었다. 그날 밤 김석은 괴로운 마음을 달래려고 신풍옥으로 향했다. 태호가 다른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다면 비록 산모가 문둥병자라 해도 그 병자를 기꺼이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을 만큼 생모를 증오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오셨네요.”
  “매상도 못 올리는 주제에 자주 와봤자 눈치만 사지 뭐.”
  “왜 이리 삐딱하세요?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 보죠?”
  “기분 나쁜 게 아니고 슬퍼서 그래.”
  “슬픈 거나 기분 나쁜 거나 마찬가지죠. 슬픈데 기분 좋을 리 없잖아요?”  
  “나는 묘한 인간이라 슬퍼야만 기분이 좋아져. 슬픔에서만 기쁨이 느껴지거든.”
  “또 안개 같은 말씀만 하시네.”
  “어서 술이나 줘! 아아 괴롭다, 시팔!”
  옥자는 김석의 느닷없는 추태가 어이없어 보였다. 파출소 직원들 중에서도 말수가 적고 술상머리에서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던 김 순경이 오늘따라 왜 이럴까? 막걸리와 해장국을 챙겨온 옥자는 얼른 김석 곁으로 가서 어깨를 껴안아 주었다. 김석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서둘러 술을 마신 김석은 눈물의 내력을 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자가 거절하는 술값을 억지로 쥐어주고 밖으로 나온 김석은 뒤따라 나온 옥자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몸을 아껴.”
  그 말은 풍기문란 일제단속에서 걸려들었던 옥자의 경범죄를 놀리는 말이었다. 홀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려고 손님을 따라 여관에 갔다가 매음으로 적발된 옥자를 김석이 몰래 훈방조치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봐. 이 애는 누구 애지?” 
  “당신 애지 누구 애라뇨?”
  “그렇게도 착하던 옥자 씨가 이게 뭔 짓이오?”
  “뭔 짓이라뇨? 그럼 나를 모른다는 말에요?”
  “알긴 알지만 애는 모르는 일이야. 옥자 씨와 술만 마셨지 함께 잔 적이 없잖아. 그런데 왜 앰한 헛소리를 지껄이냐구.”
  “당신이 집을 나갔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내가 집을 나가다니? 도대체 누구한테 행패를 부리는 거야!”
  “이 애가 증거잖아요? 얼굴이 당신과 닮았잖아요? 자식은 부모를 닮게 마련 아녜요? 그런데도 시치미를 떼다뇨.”
  “미치겠구먼.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니, 이봐! 정신 똑바로 차려!”
  “화만 내시지 말고, 이 여자는 누구에요?”
  “내 아내지 누구야!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라구!”
  “여보, 당신 어느새 첩을 들였어요? 하기야 집 나간 지 오래됐으니까 첩을 들일만도 하지.”
  “그만 조용하시고 나와 얘기해요.”
  수니가 옥자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당신이 누군데 나와 얘기하자는 거죠?”
  “나는 김석 씨 첩이오. 그러니 조용히 서로 사연을 털어내 봅시다.”
  “여보, 이 여자 아무래도 이상해요. 자청해서 첩이라고 하는 걸 보니 사기꾼 같아요.” 
  김석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무슨 낌새를 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정신이상자라 해도 무조건 내칠 수는 없었다. 수니의 오해가 문제였다. 무슨 수로든 오해부터 풀어줘야 했다.
  “이봐 옥자 씨, 여기서 그만 행패 부리고 저 애 아빠가 누군지 그거나 어서 말해. 아빠가 언제 집을 나갔으며 여기는 어떻게 찾아왔는지.”
  “언제 나간 지는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당신을 찾으려고 얼마나 뒤지고 다녔는지 아세요? 찾다찾다 못 찾아서 경찰서에 신고했던 거에요. 진작 신고하고 싶었지만 당신을 욕 먹이기 싫어서 몰래 찾아다녔죠. 내가 이만큼 당신을 아끼는 것 알죠, 여보?”
  “이보세요, 할애기 남았으면 나와 방에서 조용히 나눠요.”
  수니가 소매자락을 끌자 옥자는 갑자기 소리를 내질렀다.
  “첩년이 어따 대고 지랄야! 나는 엄연히 김석 씨 본처야 이년아!”
  이번에는 수니가 소리쳤다. 
  “여기서 난리 피지 말고 나가! 왜 여기 와서 난리야! 아니 그러지 말고 둘다 나가! 둘이서 해결하라구!”
  김석은 입술을 깨문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처럼 난감한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궁리하는 중이었다. 눈을 뜬 김석이 수니에게 말했다.
  “여보, 오해하지 마. 이 여자는 미친 여자야. 화를 가라앉히고 구경이나 해. 나도 지금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마음을 다잡고 있는 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