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용교도소(代用矯導所)
“출판기념회를 여셔야죠.”
“그런 짓 안 해.”
동료 의원들과 당원들에게 책값 핑계로 봉투 받는 걸 꺼린다는 말이었다. 청렴한 그의 인품에서 우러난 말이었다.
“두 교수가 만나도록 주선해준 것 아들이 고맙게 여기고 있어. 한동네에 살면서도 먼 이웃으로 살아왔는데 김 형사 덕에 둘 사이가 친해졌대.”
두 교수는 경제학 교수인 최 의원 아들과 영양학 교수인 이승만 대통령 양아들을 지칭했다. 양아들 이 교수는 김석을 가끔 이화장(梨花莊)으로 초대했는데 양어머니인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김석을 친한 친구라고 소개했고, 프 여사는 김석에게 넥타이핀 같은 가벼운 선물을 주곤 했다. 악수로 내민 영부인의 자상한 손길에서 정분이 느껴지면서도 김석은 마음 한 구석이 서운했다. 자상한 손길처럼 좀 더 자상한 내조가 작용했더라면 4.19의 비극을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오늘은 강릉경찰서 유치장 얘기를 더 듣도록 하지. 죄수들 이야기가 아주 유익했거든. 도스토예프스키도 시베리아 옴스크 감옥 생활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잖아? 김 형사도 다양한 죄수들을 다뤘다고 했는데 앞으로 창작에 큰 보탬이 될 거야.”
“어서 창작에 매달려야 할 텐데, 업무가 바쁘다 보니 고민이 많아요.”
“김 형사의 재능이 아까워. 그렇다고 현직을 그만두라는 말은 아냐. 형사생활은 오히려 창작에 큰 보탬이 될 거라구.”
“문장 연습 삼아 일기를 써오고 있습니다. 일종의 수상록이랄까요.”
“나도 작가를 소망했는데 어쩌다 정치를 하게됐는지 후회가 막심해.”
“빅톨 위고도 대문호이면서 정치에 관여했잖아요.”
“가치의 비중을 어디에 두었느냐가 문제지. 위고처럼 창작에 비중을 두었더라면 이처럼 후회하진 않을 텐데.”
“제가 서울에서 동해안으로 좌천을 자청한 것도 글쓰기 위해서였죠. 봉급을 받으면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한가한 시골 좌천뿐이었습니다. 기왕 좌천 될 바에는 낯선 동해안을 떠올렸고, 강릉경찰서에서도 가장 기피하는 유치장 근무를 자청했고요.”
“좌천이 아니라 영전인 셈이군. 실속 있는 좌천은 영전 아닌가?”
최 의원은 덜퍽진 웃음을 날렸다.
강릉경찰서 유치장은 전국에서 논산, 거제 등 여섯 군데밖에 안 되는 대용교도소(代用矯導所)로 일반 교도소처럼 규모가 컸다. 강릉시를 비롯하여 고성군, 속초시, 양양군, 명주군, 삼척군 등 강원 동부지역에서 모인 삼백여 명의 죄수 숫자로 보나 수감자의 유형으로 보나 교도소와 다름없었다.
김석이 간수 근무를 시작하고 일년쯤 지나서였다. 가을비가 추적거리는 밤에 텅 빈 수사과 사무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유치장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김석은 얼른 유치장으로 달려가 시끄러운 감방으로 다가갔다. 두 간수가 20대 살인범의 양팔을 잡고 있는데 목에서는 피가 흘렀다. 살인범은 김석이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정태수였다. 자해한 칼은 수저를 동강내서 날카롭게 다듬은 알미늄 토막이었다. 상처를 응급처치한 김석은 정태수를 수갑 채워 수사과 사무실로 데려갔다. 김석의 주먹이 정태수의 뺨에서 작렬했다.
“김 형사님의 매는 달게 받겠습니다.”
정태수의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서 말해! 왜 그랬어?”
“죽고 싶었습니다.”
김석은 죄수를 의자에 앉히고 담배에 불을 당겨주었다.
“피워.”
“제가 김 형사님을 치고 도주할 수도 있는데요?”
“수갑을 풀어줄까?”
“철길에 목을 얹고 밟아죽인 걸 모르세요?”
“짜아식! 네놈은 악마가 될 수 없어. 그러니 까불지 마.”
어머니와 누나를 겁탈한 선주의 목을 비튼 정태수는 20년 징역형을 받고 서울로 압송될 처지였다. 김석이 그를 서울 서대문교도소로 압송한 것은 난동을 피우고 한 달쯤 지나서였는데 압송 중에 벌어진 일이 최 의원의 관심을 끌었다.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까지 정태수를 압송한 김석은 수갑을 풀어주고 서대문교도소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태수는 도주하지 않고 약속시간에 나타나 수갑을 채우라며 손목을 내밀었다.
“어이없는 얘기군. 꾸민 얘기가 아니겠지? 만약 도주했다면 문책이 서장이나 치안국장 선으로 끝나겠는가?”
“그 대신 신의(信義)가 무엇인지 그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김 형사, 자네가 악마군 그래. 어서 명작(名作)에 매달리게나.”
최 의원은 김석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나서 말을 보탰다.
“하지만 아무리 살인범의 인간성을 믿었다 해도 그 무모한 짓을 합리화 시킬 수는 없네. 비록 살인범이 약속을 지켰다 해도 그걸 신의와 결부시킬 수 없다는 말이지. 신의는 이성적인 행위일 때 빛 나는 법이네.”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그렇다고 김 형사의 무모한 행위를 매도하는 것은 아냐. 왜 그런 행위를 했는지 그 동기가 중요하거든. 수갑을 풀어준 동기가 감동을 유발시킬 수 있다면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지. 다시 말해 이성적인 행위가 아니어도 신의로 인정할 수 있다는 거네.”
최 의원의 말을 듣고 보니 김석은 압송 당시 수사과장의 당부가 떠올랐다. 그날 이른 아침이었다. 수사과장은 버스터미널까지 나와 김석에게 신신당부했던 것이다. 버스에 오르거든 곧바로 자네 손목에 연결수갑을 채우고 교도소 인계가 끝날 때까지 절대 풀지 말게. 똥은 뉘었으니 오줌은 함께 누도록 하고 수갑은 교도소에서 그쪽 열쇠로 풀도록 하게나. 사람 목을 철길에 매놓고 동강 낸 놈인데 만약 도주할 경우 문책이 장관 선까지 비화할지도 모르네. 도주가 경찰의 삼대(三大)사고 중에서도 가장 크잖은가?
'연재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9회) (0) | 2023.01.17 |
---|---|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8회) (1) | 2023.01.10 |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6회) (1) | 2022.12.27 |
연재소설[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5회) (0) | 2022.12.20 |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4회) (1) | 2022.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