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5회)

충남시대 2022. 12. 20. 15:22

아내를 찾아다니다

 

춘천행 첫 버스를 타면 오전 중으로 양구에 도착할 것이었다. 수니가 친정에 갈 리가 없지만 가까이 지낸 처제네 집 정도는 탐문할 참이었다. 첫차인데도 춘천행 버스는 번다했다. 김석은 창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때 나이든 아줌마가 빈자리를 살피다가 김석 옆에 앉았다. 마음이 다급한 김석은 아줌마에게 물었다.
  “춘천에서 양구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죠?” 
  “소양강 땜에 물이 차기 전에는 가까웠지만 지금은 화천으로 돌아가야 하니 꽤 멀다우. 이따 차장아가씨가 타걸랑 물어보구래.”
  “참 그렇네요.”
  “양구 사는 분이 아니우?”
  “서울에 삽니다.”
  “면회 가는 거우?”
  “군인가족이 아닙니다.”
  “그럼 뭔 일로 양구 가는 거우?”
  김석은 새벽잠을 설친 핑계를 대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혼자 마음을 달달 볶느니 차라리 아줌마와 수다를 떠는 게 낫지 싶었다.  
  “사실은 아내를 찾으러가는 중입니다. 처가가 양구거든요.”
  “하하하하, 그러면 그렇지. 내 예측이 틀림없어. 아내 찾아가는 모양이 얼굴에 써 있더라구. 나도 부부싸움 만큼은 일급이라우.”
  “일급이라뇨?”
  “친정집으로 도망쳤다는 말이지.”
  “저는 처갓집 몰래 시집간 처제를 만나러 가는데요?”
  “형제를 찾아가는 건 이급이라우. 친구네 집에 숨는 건 삼급이구.” 
  “그럼, 방을 얻어 숨어버리면 사급이겠네요?”
  “그거야 특급이지. 삼급까지는 집에 돌아갈 마음이고 특급은 아주 끝장낼 심보라우.”



  천만다행이었다. 아내에게 방 얻을 돈이 없으니 끝장은 아니었다.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차츰 기분이 살아났다. 어느새 버스도 춘천터미널에 도착했다. 다행히 양구행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손님을 태운 버스는 비포장도로를 달려 오후 느즈막에야 양구에 도착했다. 김석은 택시를 타고 처제네 집으로 직행했다. 수니보다 먼저 결혼한 처제는 언니가 집 나갔다는 말을 듣고도 여유를 부렸다.
  “합숙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싸워요? 훔쳐갈 때의 열정은 어쩌고?”
  “합숙이 아니고 동거지.”
  “동거나 합숙이나 그게 그거지 뭐.”
  “착한 형부 속이면 형법에 걸리는 것 알지?”
  “그럼 거짓말 하란 말에요? 오지 않은 언니를 왔다고? 못 믿겠으면 뒤져봐요. 숨을 곳이래야 농기구창고와 외양간밖에 더 있어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어디서 울고 있겠죠. 나한테나 올 거지. 어이구 맹추.”
  “동면 부모님께는 비밀로 해줘.”
  “비밀 지켜주는 대가를 톡톡히 뜯어내야 하는데....”
  “나중에 은혜 보답할게. 서울에 양옥집 사놓고 처제 이사시킬 거라구.” 
  “에게게, 쥐꼬리만한 봉급으로 어느 세월에 양옥집 사지?”
  “나 사표내고 장사할 거야.”
  “장사 체질은 아니시고, 처갓집 정미소를 맡아보면 어때요? 아버지와 화해도 되고. 사위가 아니라 딸 훔쳐간 도둑놈으로 여기시니까.”
  “정미소는 나중 문제고, 어디로 숨었을 것 같애?”  
  “부모형제한테는 얼씬도 않을 거에요. 양구와 담쌓고 지내온 맹춘데 찾아올 리 없죠. 그나저나 집 나간 이유가 뭐에요?”
  “가난에 지쳐서 그랬을 거야.”
  김석은 말을 둘러댔다. 차마 집 나간 이유를 꺼낼 수 없었다. 
  처제네 집을 나온 김석은 곧장 양구읍내로 가서 버스에 올랐다. 맥이 빠졌다. 도대체 어디에 숨었단 말인가? 여 씨네 집안이 아니면 그럼 김 씨네 집안? 그렇지. 이번에는 김 씨네 집안을 뒤져보자. 먼저 생질녀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의정부에 사는 연희는 유독 외숙모를 따랐는데 외숙모네 집에 올 때마다 김석을 닦달하기 일쑤였다.
  “숙모, 하루빨리 외삼촌과 찢어져. 삼촌처럼 깔끔떠는 남자와 어떻게 살아. 내 머슴처럼 수더분해야 맘 놓고 살지.”
  머슴은 연희가 사귀는 동갑내기 총각을 두고 한 말이었다. 김석도 악담을 퍼부었다.
  “네년 시집가는 날 결혼식장을 발칵 뒤집어놓을 테다. 신부는 잠잘 때마다 이를 갈고, 5분이 멀다하고 방귀 뀌는 여자다. 그러니 신랑은 당장 예식장을 탈출하라! 그럴 거라구.”
  “숙모, 저런 분과 어떻게 살아요. 평생 쌈만 할 테니 어서 찢어져요.”
  “그런데, 연희가 어째서 삼촌을 웬수로 여기는 거야?”
  “글쎄, 삼촌이 나더러 네 머슴 작작 부려먹어라. 불쌍해서 못 보겠다, 그랬다구요. 그 바람에 우리 머슴이 꼴불견이 됐다니까요. 나도 외삼촌처럼 주권을 찾겠어. 밥도 안 짓고, 빨래도 안 하고, 그렇게 으름장을 놨다구요. 기가 막혀서.” 
  김석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의정부에는 밤에야 도착했다. 여관에서 자고 아침 일찍 연희를 찾아갔다. 연희는 호들갑을 떨며 김석을 반겼는데 그런 과잉반응이 수상했다. 
  “숙모 찾는 일 아니면 의정부에 오실 리가 없죠?
  “싸운 것 아냐. 네 숙모가 이상해졌어.”
  “숙모가 어때서요?”
  “유서를 써놓고 나갔어.”  
  얼떨결에 나온 말이었다. 
  “유서요? 얼마나 크게 싸웠길래 유서를 써요?”
  “싸운 게 아냐. 왜 유서를 썼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김석은 유서란 말을 거듭 강조했다. 가장 효과적인 핑계였다. 생각할수록 기막힌 아이디어였다.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