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4회)

충남시대 2022. 12. 13. 10:20

함석헌 옹과의 흥정 

서울대 법대생들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지만 전태일의 죽음은 날이 갈수록 시국을 뒤흔들었다. 서울대는 물론 다른 대학들도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종교단체, 노동단체에서도 연일 소요사태가 격렬했다. 불교 단체는 물론 기독교 단체에서도 추도예배를 거행했으며 언론에서도 사설로 다루기 시작했다. 한국기독교 총학생회에서는 전태일 추모 강연회를 열었는데 ‘부활과 4월혁명’을 주제로 삼았다. 김석은 기독교방속국 2층 사무실로 들어갔다. 함석헌 옹(翁)을 중심으로 <사상계>를 창간한 장준하 등 십여 명의 지도자들이 앉아 있었다. 김석은 함석헌과 두세 번 만난 사이여서 구면이었다. <사상계>를 정기구독할 정도로 애독자였기에 김석은 함석헌과의 대화가 의미 있게 여겨졌다. 당시 사상계는 한국에서 가장 수준 높은 지성지였지만 김지하 시인의 오적(五賊)시 게재 사건으로 폐간되었다. 


  “십자가를 메고 조용히 행진만 할 테니 이해해요.” 
  함석헌의 점잖은 요구였다.
  “종로5가까지는 묵인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김석의 협조적인 말에 함석헌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였다. 밖에서 함성이 들려와 창을 열어보니 어느새 데모대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들은 십자가를 멘 선두의 뒤를 따랐다. 김석은 얼른 진압부대에 연락을 취하고 건물을 빠져나갔다. 데모대는 찬송가를 부르며 질서 있게 행진했다. 그런데 종로5가에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와 하고 종로3가 쪽으로 밀고 올라갔다. 세종로를 향했던 것이다. 김석은 무전으로 급보하고 채증에 들어갔다. 금방 동대문서 대기병력이 출동하고, 뒤미처 내자동 기동대원을 태운 4대의 버스가 선두차의 에스코타를 받으며 출동했다. 사이렌을 울리는 선두차에서는 페퍼포그가 작렬했다. 데모는 금방 수습되었다. 하지만 전태일 추모 행사와 가두시위는 날이 갈수록 무성해졌고 그걸 기화로 대학가에서는 다양한 요구가 분출되었다. 학교 군사교련 전면 철폐와 언론자유 수호가 그 예였다.

  통금시간이 가까워져서야 집에 돌아온 김석은 몸을 씻고 방에 누웠다. 드디어 아내를 찾아나서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다보니 갑자기 태호 생각이 떠올랐다. 임신한 몸으로 산동네 생활에 지친 수니에게 태호까지 돌보게 할 수 없어 홍성 누나네에 맡겼던 것이다. 7살이면 한참 말썽 피울 나이어서 누나는 어서 데려가라고 야단이었다. 
  “으이구, 새끼가 워찌나 지랄떠는지 감당을 못 허겄어. 동네방네 휘젓구 댕기면서 못된 짓만 골라 헝게 사람이 미치겄단 말여. 애호박 따서 공치기를 않나, 남이 집 마당에다 똥싸질 않나, 참외 따먹다 들켜서 쬣껴댕기질 않나, 증말루 챙피해 못 살겄어. 그렁게 얼른 데려가라구. 지발 나 좀 살자구.”   
  “누나, 애기 날 동안만 참아줘, 그처럼 말썽 피는 앤데 몸 약한 임산부가 어떻게 감당하겠어. 잘 살 때 누나 호강시켜줄게.”
  “말은 그럴 듯헌디 늬 덕을 볼 때가 은제겠냐구. 산동네서 하꼬방살이 허는 주제에 은제 누나 호강시켜준다구 헛소리 허능겨. 당최 그런 소리 말구 지발 새끼나 데려가.”
  “하여튼 눈 딱 감고 석 달만 기다려줘. 그리고 제발 지서에 가서 전화 걸지 마. 꼭 걸고 싶으면 지금처럼 공중전화를 이용해.”
  “공중전화비가 한두 푼여? 오래 걸믄 전화비가 얼만지 알어? 낸들 순경 눈치보는 게 좋아서 그런겨? 하두 폭폭헐 때는 기절헐 판인디 늬헌티 전화두 못 걸믄 나 환장혀 죽어. 알겄남? 그렁게 어서 데려가줘. 응?”  
  “알았어.”
  “말만 알았다구 허지 말구 어서 데려가.”
  “알았다구. 데리고 간다구!”
  “얘 좀 봐. 지금 누나헌티 앙탈부리는겨? 늬놈이 태호어매라믄 죽고 못 사는디 지발 속 차려. 그 인간 애끼겠다구 누나 고생시켜? 싸가지 읎는 놈! 그렁게 태호어매는 금덩이구 나는 똥바가지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왜 하나뿐인 누나를 똥바가지로 여긴다는 거야. 수니 입장을 이해할 수도 있잖아? 철없는 나이에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도 오직 나만 바라보고 살잖아? 부모형제도 잊고 사는데 맘이 얼마나 허전하겠어. 수니는 친구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생활비 보태겠다고 편물기만 끌어안고 사는 독한 여자라구. 태호를 끔직히 생각하는 마음씨를 보라구. 자기가 낳은 애도 아니잖아. 그런 여자가 흔하겠냐구.” 
  “그렁게 내가 태호어매를 끔찍이 여기는 것 아녀? 늬가 그런 속도 모르구 누나만 원망헝게 억울헌 거구.”
  “왜 누나를 원망한다고 그래? 내가 의지할 사람이 누나밖에 더 있어?” 
  “도대채 을마를 더 참아달라는 거여? 닷새여, 열흘여?”
  “앗다, 누나 성질 되게 급하네. 다섯 달이여, 열 달이여, 그러면 몰라도 닷새나 열흘이라니, 그게 하나뿐인 동생한테 할 말야?”
  “나 속 타 죽어. 태호는 조카새끼가 아니구 웬수 덩어링게 그리 알어.” 
  태호는 여섯 살 때까지만 해도 의젓했다. 수니에게는 친구 역할도 톡톡히 했다. 온종일 산동네 구석방에서 지내야 하는 수니에게 태호는 유일한 말벗이었다. 우물에서 물을 길을 때도 태호 몫이 컸다. 물통을 들고 미리 줄을 서서 엄마의 수고를 덜어주곤 했다. 태호는 엄마의 뱃속에 들어 있는 은영이도 한 식구로 쳤다.   
  “우리 식구는 아빠캉 엄마캉 은영이캉 나캉 막흔 넷이래요.”
  태호는 동해안에서 자란 탓에 사투리가 묘했는데 수니는 그런 태호를 꼭 껴안아주곤 했다. 그처럼 착한 태호가 말썽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중학생이 되고부터였다. 동네 불량배들과 어울렸던 것이다. 빈민촌인 산동네는 부모가 모두 날품을 파는 바람에 자식들은 온종일 버려진 상태였다. 중학생일 때부터 담배를 배우고 술을 즐겼다. 심지어는 서너 명씩 몰려다니며 구멍가게에서 과자나 빵을 훔쳐먹기 일쑤였다. 하지만 밥벌이에 지친 부모들은 자식을 훈육할 여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