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2회)

충남시대 2022. 12. 1. 11:26

수니의 첫 번째 가출


사십오륙 년 전, 양구경찰서에서 서울 동대문경찰서로 전근되어 미아리 산동네에서 수니와 신접살이할 때였다. 근무교대를 마치고 오후 일찍 귀가해서 물을 마시려고 부엌문을 열었는데 벽에 붙은 찬장에 하얀 구더기들이 기어다녔다. 판자 문틈으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구더기도 있었다. 얼른 찬장문을 열어보았다. 선반 위에 나란히 놓인 네 개의 밥그릇 중에서 왼쪽 구석에 놓인 그릇에 거무스름한 곰팡이가 가득 피어있고 그 속에 구더기가 득실거렸다. 먹다 남은 찬밥이 여름 무더위에 쉬어터져 생긴 구더기였다. 다른 세 개의 밥그릇도 살펴보았다. 바로 옆에 놓인 그릇에는 푸르스름한 콤팡이가 끼어 있고, 그 옆에 놓인 그릇에는 누르스름한 곰팡이가 끼어 있고, 마지막 그릇에는 희읍스름한 곰팡이가 끼어 있었다. 날짜 차이에 따라 곰팡이 색채가 마치 도 래 미 파 음계처럼 점점 짙어졌다. 예를 들어 희읍스름한 색체는 닷새쯤 묵음 밥, 누르스름한 색채는 열흘쯤 묵은 밥, 푸르스름한 색채는 보름쯤 묵은 밥, 거무스름한 색채는 스무날쯤 묵은 밥이랄까.


  김석은 가슴이 철렁 주저앉았다.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희망이 곤두박질쳤다. 수니는 땀을 흘리며 낮잠을 자고 있었다. 임신한 몸으로 산골짜기에서 물통을 져날라야 하니 얼마나 고달플까! 그 연민이 가슴을 치는 바람에 화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수니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밖으로 나오니 그제야 욕이 터져나왔다. 
  씨팔! 어쩌지? 
  화가 치올랐다. 하지만 고생하는 아내에게 화풀이할 처지가 아니었다,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언제 왔어요?”
  잠을 깬 수니가 부엌으로 나오며 맥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도 힘겨운 모양이었다. 김석은 임신 중인 수니를 생각해서 조용한 목소리로 불만을 드러냈다.  
  “웬 구더기야?”
  수니는 놀라는 기색 없이 찬장에 붙어있는 구더기를 수수비로 털고 부뚜막에 떨어진 구더기를 쓰레받기에 담아 마당가에 버렸다. 그리고 썩은 밥을 양은대야에 담아 바깥 쓰레기장에 비우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와 그릇을 닦았다. 
  “밥 썩는 것도 몰라?” 
  김석은 조심스런 목소리로 나무랐다. 하지만 금방 그 신칙이 후회스러웠다. 그래서 다른 말로 달래줄 참인데 수니는 벌써 방으로 들어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깨를 다독이며 달래봤지만 수니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김석은 찬장 구석에 놓아둔 소주병과 김치 접시를 꺼내 부뚜막에 앉아 들이마셨다. 지친 몸에 술기운이 배자 금방 졸음이 덮쳤다. 방에 들어가 수니 곁에 누웠다. 얼마나 잤을까, 깨어보니 방안이 캄캄했다. 대여섯 시간쯤 잔 모양이었다. 일어나 불을 켰다. 수니가 보이지 않았다. 밖에 나가 캄캄한 골목을 헤집고 다녔다. 없다. 수니와 친하게 지내는 옆집 경수엄마네 쪽대문을 노크했다. 
  “누구슈?”
  “접니다. 수니네....”
  경수엄마가 부리나케 뛰쳐나와 문을 열었다. 불빛에 비친 내 표정을 살피고 나서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컴컴헌 오밤중에 오신 걸 봉게, 급헌 일인감유?”
  “별일 아닙니다. 혹시 제 식구가 들렀는가 해서....”
  “얼레, 새댁이 그럴 여잔감유. 아무리 급헌 일이 생겨두 오밤중에 나미 집에 들릴 여자가 아니쥬.”
  “네에, 죄송합니다. 혹 잠을 깨시게 한 건 아닌지....”
  “아녜유. 즈이는 늦잠 자는 게 버릇이 됐구먼유. 즈이 남편은 자정 넘어서까정 화투로 점괘를 봉게 증말 짜증나유. 어서 직장을 구해야 헐 틴디.”
  “부지런하신 분이라 곧 직장을 잡겠죠. 그럼 편히 주무세요.”
  김석이 자리를 뜨려는데 경수엄마가 발길을 세웠다.
  “그렁게 무슨 일이 생겼남유?”
  “아녜요. 제가 퇴근해서 낮잠을 자다가 깼더니 안식구가 보이지 않아서요. 첨 있는 일이어서....”
  “허면 저허구 함께 골목을 뒤져볼까유?”
  “괜찮습니다. 집에 돌아가 기다리겠습니다.”
  “인간사가 원래 그렇구먼유. 뭔 일이 느닷없이 생겼다가 느닷없이 없어징게 어리둥절헐 때가 허다허쥬.”
  “그렀습니다. 날 새기 전에는 돌아오겠죠. 이만 가보겠습니다. 벌써 왔을지도 모르죠.”
  김석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혹을 떼러갔다가 혹을 붙인 꼴이었다. 집에 돌아와 건넌방을 뒤져보았다. 짐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하나뿐인 가방이었다. 아끼던 구두도 사라졌다. 떠났구나! 그제야 책상 위에 놓인 종이쪽이 눈에 띄었다.

  사랑하는 당신!
  이제야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괴롭히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당신 곁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걸, 그게 내 운명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당신 내복은 건넌방에 있으니 찾아입으세요. 빨래를 서둘러 걷는 바람에 옷이 뒤섞였을 거에요. 옷을 갤 경황이 없었어요. 
                                     당신을 사랑하는 수니 드림   

  빌어먹을! 눈앞이 캄캄했다. 만삭의 몸으로 어디에서 헤매고 있을까? 용돈도 없을 텐데, 남한테 꿔서라도 넉넉히 지닐 게지. 못난 것! 그딴 일로 집을 나가다니. 김석은 연애시절을 떠올려보았다. 그 아름다운 시절로 오늘의 비참한 순간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처갓집에 미안했다. 훔쳐간 딸을 내쫓은 격이었다. 이런 꼴을 처가에서 알면 얼마나 원망할까? 요를 깔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녘에야 잠간 눈을 붙였다가 일찍 출근했다. 수니를 찾아나서려면 휴가부터 얻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