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19회)

충남시대 2022. 11. 1. 16:38

유혜미의 편지

  “멋지긴 뭐가 멋져. 내가 바보였지.”
  “여보, 바보일 때가 젤 아름다운 거야.”
  수니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문갑 속에서 빛바랜 편지 한 통을 꺼내왔다. 유혜미와 마지막 헤어질 때 받은 편지라고 했다. 

  언니, 생각 할수록 큰 죄를 지었어요. 제가 언니에게 남편을 양보해달라고 한 말, 이제 생각하니 너무 철없는 짓이었어요. 그런데도 언니는 웃으시면서 그건 안 돼! 그러셨죠? 언니는 천사에요.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은영아빠와는 딱 한 번 키스한 게 다에요. 믿어주세요. 유혜미 올림” 


  “이걸 삼십 년 넘게 보관해온 거야?”
  “짐을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했어. 당신과 헤어지고 싶으면 무기로 쓸려고 숨겨뒀지.”
  “그런데 남편을 양보해달라는 말이 뭔 소리야?”
  “글쎄 집에 찾아와서 어이없는 말을 하더라구. 사모님이 선생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 모양인데 제게 양보해주시면 안 되겠어요? 그러더라구. 기막혀서 말이 안 나오더라구.
  “혜미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는 거야?”
  “당신이 아버님 산소에 다녀오겠다며 동해안으로 떠난 것 이억해?”
  “매년 산소에 다녀왔는데 그날을 어떻게 기억해.” 
  “암튼, 그날 밤이었어. 왜 집에까지 찾아와 그따위 말을 했는지 몰라.”
  “그날 밤 정황을 자세히 말해봐.”
  “흥, 신나는 모양이지?”
  “신나는 게 아니고, 너무 기막혀서 그래.”
  “캄캄한 밤인데 대문 초인종소리가 들리더라구. 누구냐니까 사모님을 뵈러왔다는 거야. 여자 목소리여서 나가봤더니 낮짝이 빤지레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 말을 하는 거야. 화를 내려다 꾹 참고, 그동안 둘이 자주 만났냐고 물어봤지. 네댓 번 만났지만 손도 잡은 적이 없다는 가야. 직업이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학교 선생을 삼 년 하다 그만뒀대. 못된년은 아니구나 싶어 마음이 놓이더라구.”
  “그래서?”
  “김석 씨에게 직접 물어볼 일이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느냐, 그랬더니 남편에 대한 호칭만 봐도 사모님 애정이 식은 게 확실하다는 거야.”
  “이름 대신 뭐라고 칭하란 거지?”
  “김 선생이나 우리남편 따위의 호칭을 쓰라는 거겠지.”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어이구, 한심한 사내!”
  “언제 적 일인데 화내고 그래. 추억담처럼 재밌게 털어놔봐.”
  “재미는 개뿔 무슨 재미. 그 두세 마디가 전부야.”
  “당신은 뭐라고 했어?”
  “둘이 해결할 문제니 다신 나한테 나타나지 말라고 타일렀지. 그처럼 순진한 게 어딨어. 웃을 수도 없고 화낼 수도 없고....”
  “그 후로 어찌 됐지?”
  “어쩌긴, 그 후로는 당신도 알다시피 함께 어울렸잖아. 이틀이 멀다하고 집에 찾아왔는데도 몰라?”
  “왜 찾아왔을까?”
  “나를 보고 싶어서 찾아온다는 거래. 정원에서 노는 은영이를 하도 예뻐해서 집안에 들였더니 재밌는 얘기가 술술 나오더라구.”
  “무슨 얘긴데?”
  “사모님이랑 언니동생하며 함께 살면 신나겠다는 거야. 그러니 당신은 두 마누라를 데리고 사는 셈이지.”
  “그렇게 되면야 당신 팔자는 늘어진 상팔자가 되지. 혜미를 도우미처럼 써먹으면 되잖아. 은영이도 혜미가 키우게 하고, 복잡한 집안일도 혜미에게 맞기고, 골치 아픈 종업원 관리도 혜미에게 맞기고, 우리 둘은 만날 여행이나 다니면 얼마나 좋아.”
  “사실은 장사 땜에 은영이 맞길 사람을 물색하던 중이었어. 당신도 업소 일 보랴 여기저기 칼럼 쓰랴 쉴 새 없이 바쁘구.”
  “이래저래 잘됐다, 그거군?”
  “그 바쁜 중에도 언제 연애할 짬을 내서 혜미를 꼬셨지?”
  “꼬신 게 아냐. 하기철 아나운서와 술집에 갔다가 만났어. 굉장히 학구적이고 진지해서 동생처럼 여겼을 뿐야.” 
  “동생 좋아하네. 솔직히 말해봐. 남편을 양보해달라고 말하는 걸로 보아 키스로 끝낼 사이가 아니잖아?” 
  “진짜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그러네. 혜미 혼자 북 치고 장구 친 거라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애야. 너무 엉뚱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김석은 속으로 꿀렸다. 그동안 여러 번 혜미와 키스를 해온 터라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싶어 아버지 산소 핑계를 대고 동행을 꼬드겼던 것이다. 혜미는 자꾸 동행 이유를 캐물었다. 동해안으로 차를 몰고 갈 때도 동행 이유를 꼬치꼬치 캐물었는데 김석은 “그것도 몰라?” 하고 짜증을 냈다. 그러자 혜미도 언성을 높였다.
  “그것이라뇨? 저는 타당성이 있어야 그것의 뜻을 이해할 수 있어요. 타당성이 없으면 그것은 한갓 지시대명사에 불과해요.”
  “까다로운 여자군. 타당성이 뭐지?”
  “그야 뻔하잖아요? 진짜 사랑인지. 일시적인 유희인지....”
  “그런 식으로 계산하면서 연애감정이 생겨?”
  “연애감정이 생기니까 계산하는 거죠.”
  “계산을 전제로 한 연애감정은 연애감정이 아니지.”
  “그렇다고 무조건 몸을 줘요?”
  “참 기막힌 여자군. 참 매력 있는 여자야. 무슨 매력인진 모르지만.”   
  “따지는 매력이겠죠. 과학적인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