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18회)

충남시대 2022. 11. 1. 16:36

 송아는 잠들어 있었다. 김석은 침대에서 일어나 찬물을 마셨다. 아직도 정신이 몽롱했다. 소파에 앉아 주먹으로 머리통을 두들겼다. 
  “술 깨셨어요? 괴로워 말고 어서 내 곁에 와 누우세요.”
  어느새 깨어났는지 송아가 침대에 누운 채 손을 깝죽거렸다. 잠옷 밖으로 내비친 뽀얀 가슴과 허벅지가 김석의 시선을 유혹했다. 
  “무슨 남자가 그래요? 예쁜 여자를 곁에 두고도 곯아떨어지다니.”
  결국 송아의 품속에 휘감기고 말았다. 빌어먹을! 편리한 대로 살지 뭐. 구원(救援)이나 성불(成佛) 따위는 훗날로 미루면 돼. 광활한 우주 속에서 내 타락을 누가 눈여겨볼 수 있겠는가. 아무리 유능하신 하느님도 수천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내 타락을 감시하실 수 있을까? 


  “당신한테 첫눈에 반했어요. 이유는 몰라요.”
  포옹을 풀고 나자 송아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김석은 기분이 잡쳤다. 마음속 밑바닥에서 양심의 소리가 치올랐다. 미친놈 미친 짓하고 자빠졌네. 지금 수니는 울고 있어 요놈아! 너 수니 대신 송아와 살 수 있어? 대답해봐. 너 송아에게 영혼을 팔아먹을 수 있냐구? 너는 천성이 착해서 얼굴에 철판을 깔 수 없어. 그러니 까불지 말고 어서 수니한테만 앵겨! 알겠니? 수니는 복덩이야. 끽소리 말고 수니와 오순도순 살란 말이다. 
  “표정이 울상이네요. 왜 우리의 아름다운 동침을 후회하고 있는 거죠?”
  “내 속을 어떻게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나는 타락한 여자가 아녜요. 당신도 타락한 남자가 아니고요. 그런데 당신은 막연히 우리의 동침을 타락한 짓이라고 여기거든요. 왠 줄 아세요? 타락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이죠. 지금처럼 타락한 시대는 타락이 뭔지를 모르면 당신처럼 막연히 타락했다고 여기게 마련이죠. 다시 말해서 사회가 전반적으로 타락에 중독된 상태라 얼마나 오염되었는지를 모른다는 거죠. 타락의 일상화(日常化) 현상이랄까, 때문에 그 일상화된 타락을 깨부셔서 구역질나는 타락의 진짜모습을 드러내는 게 급해요. 
  “아주 흥미로운 얘긴데, 그럼 구역질나는 타락의 실체가 뭘까?”  
  “나는 타락을 두 가지 유형으로 봐요. 죄(罪)와 야비(野卑)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소설가 잔아가 쓴 「죄와 야비」를 먼저 거론해보기로 하죠. 나는 그 아포리즘을 얼마나 자주 써먹었는지 달달 외고 있어요.”    
 
  죄와 야비는 다같이 타락의 일종이면서 본질은 판이하다. 토를 단다면, 죄는 한마디로 철이 없는 부작위적 타락으로서 속빠졌다, 미련하다, 순진하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타락이 뭔지 모르고 타락했기 때문에 구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야비는 철든 작위적 타락으로서 눈치 있다, 능숙하다, 약삭빠르다, 라고 해석되기도 하는데 타락이 뭔지 잘 알면서 타락했기 때문에 구제가 불가능하다. 
  색깔에 비유해도 마찬가지다. 죄의 색은 검고 흰 단색밖에 낼 수 없지만 야비의 색은 천연색과 같아서 자유자재로 변색할 수 있기 때문에 화려한 미덕의 색을 잘 흉내낼 수가 있다. 그래서 야비는 진실한 척, 겸손한 척, 의리 있는 척하고 잘 속일 수 있기 때문에 악 중의 악이요 독 중에서도 지독(至毒)이다. 야비가 죄보다 더 해롭다는 말은 바로 그 때문이다. 죄는 법으로 옭아맬 수 있지만 야비는 법망이란 그물로도 씌울 수 없어 더더욱 해롭다. 공자도 “그럴듯하면서 그렇지 않은 것을 싫어한다(惡似而非)”고 했지만 거짓이면서도 참인 척인 것, 범죄이면서도 법으로 다스릴 수 없는 것이 야비다. 오염되었으면서도 순수한 척인 것,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인 척인 것이 야비다. 죄를 지으면 형벌이란 매를 맞지만 야비한테 걸리면 사람이 미치고 만다.

  “그렇죠? 야비한테 걸리면 사람이 미치고 말죠? 더구나 지금은 야비한 인간이 판치는 세상에요. 야비가 가면을 쓰면 진실이 되는 세상이라구요. 가면은 아무 때고 벗겨지게 마련이라고 했지만 그건 200년 전 칸트가 살던 시대에나 해당돼요. 지금은 진실이 묻혀버리는 시대잖아요. 무서운 시대죠.”

                                                                                      *

  “동창들하고 재밌게 놀았어요?”
  동해안에서 돌아온 김석에게 수니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김석은 지친 몸을 소파에 앉히며 재미가 별로였다고 말했다.
  “사내들끼리 어울려서 그런지 쓰잘데없는 얘기나 떠들고.”
  “쓰잘데없는 얘기라뇨?”
  “사내들 얘기 뻔하잖소?”
  “여자 얘기?”
  “우와, 우리 마누라 언제 이렇게 유식해졌어. 당신이 어떻게 여자 얘기란 걸 알지?”
  “유혜미 때문에 공부 많이 했잖우.”
  “아아, 그랬구나. 우리가 동해안으로 피서 갈 때도 함께 가고, 셋이 한 방에서 잠도 자고.” 
  “셋이 잔 게 아니라 은영이까지 넷이 잤지.”
  “맞아. 혜미가 은영이 기저귀도 갈아주고 업어주기도 하고. 데리고 잠도 재우고.”
  “내가 바보지. 서방 애인인 줄도 모르고 한 방에서 잤으니.”
  “애인은 무슨 애인. 찾아오니까 그냥 만나준 거지.”
  “그땐 내가 너무 철딱서니 없었어. 그래선지 그 시절 추억이 젤 선명해. 혜미가 나한테 노래도 가르쳐주고, 둘이 어깨동무하고 정지용 시 ‘고향’ 노래도 부르고.”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그것? 역시 우리 마누라는 최고야. 혜미와의 추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니 너무 멋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