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었는데, 당신이지 뭐.”
“선을 넘다니?”
“키스는 선 넘은 것 아녜요?”
어이쿠! 걸려든 모양이구나! 등골이 오싹했다. 아무리 취했다 해도 왜 송아의 키스를 받아줬던가, 후회가 가슴을 쳤다. 김석의 표정을 곁눈질로 훔쳐본 송아가 말했다.
“염려 말아요. 나 싸구려 아녜요. 약점 드러내는 것도 탐색전에 필요한 전술이죠.”
“맞아요. 약점부터 드러내야 장점이 더 부각되게 마련이죠.”
“또 비웃는 것 좀 봐.”
“내 말끝마다 비웃는다고 하니 숫제 입을 다물게요.”
“입 다물면 쫌팽이라고 놀릴 텐데요?”
“그럼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큰일 날 소리 마세요. 나보고 자살하라는 말인데 잘못하면 살인범으로 몰려요.”
“내가 집에 돌아가면 자살한다고?”
“그 수밖에 없잖아요? 오십 평생에 겨우 쓸 만한 남자를 꿰찼는데, 포기하라면 무슨 재미로 살아요.”
빌어먹을! 계향이 같은 세컨드를 물색했는데 이따위를 만나다니....
“주름살 펴세요. 기왕 이리 된 것 집일은 싹 잊어버려요.”
“집일? 그런 소리 말아요. 나 지금 기분 만땅이오.”
“거짓말 마세요. 좀사내라고 얕잡아보지 않을 테니. 변명은 딱 질색에요. 내가 젤 듣기 좋아하는 얘기가 뭔지 아세요? 상대하는 남자의 부부 얘기에요. 예를 들자면 김석 씨 부부간의 추억담이랄까. 그만큼 나는 화통한 여자죠.”
“아내가 바로 그 점을 싫어해요. 딴 여자가 자기 얘기하는 것, 딱 질색이라구요.”
“칭찬도요?”
“칭찬 비방 죄 싫어해요. 혹 만날 일이 생겨도 그 점을 유의해요.”
송아는 속도를 줄이며 얼른 김석의 볼에 입술을 밀었다.
“어머, 멋지셔! 역시 내가 잘 골랐어. 그러니까 사모님을 뵐 기회가 생긴다는 거죠? 언제 뵐 수 있죠?”
송아는 신이 난다며 액셀을 밟았다.
“참 기막힌 여자군. 상대하는 남자의 아내를 만나는 게 신나다니.”
“그래서 내가 별종인 거에요. 당신은 앞으로 복잡한 생을 살게 될 테니 맘 단단히 먹어요.”
“속도를 줄여요. 백이십 키로 넘었어요.”
김석의 말에 송아는 일 년에 딱지 값이 몇 백 만원은 될 거라고 말했다. 벌금 내는 게 자랑거리냐고 면박을 주자 송아는 남자한테 면박 당하긴 처음이라며, 그래도 쓸 만한 남자라 버릴 수 없다고 능청을 떨었다. “나는 쑥맥이라 여자한테 무시당하기 십상이오.”
“겸손하시긴.”
“겸손은 사기꾼에게나 유용해요. 나는 겸손을 싫어해요.”
“적이 많으시겠네. 너무 솔직해서.”
“그래요. 적이 많아요. 솔직해서가 아니라 게으른 탓이죠. 부지런한 사람은 위장술이 능숙한데 나는 고지식해서 외로울 수밖에 없어요.”
“이처럼 도통한 분이 왜 쑥맥처럼 구시죠? 대지여우(大智如愚)시라 우매한 척하는 거죠?”
“내가 지혜로운 사람이면 요 모양 요 꼴로 살겠소?”
“나 같은 여자를 상대하니까 요 모양 요 꼴이다, 그건가요?”
“말장난 그만 합시다.”
두 사람은 바닷가에 이르도록 입을 다물었다. 말이 없으니 산과 바다도 조용했다. 그 침묵을 깨기 위해 술이 필요했다. 모래톱에는 석양이 번지고 있었다. 김석은 송아를 앞세워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술기운이 올라서야 굳어 있던 입이 열렸다. 하지만 할 이야기가 없었다.
“끝내 말을 아끼실 건가요?”
“말은 소통의 도구지만 소통을 오염시키기도 하죠.”
“왜 자꾸 말을 배배 꼬죠? 지금 사모님 생각에 빠져있는 거죠? 사모님이 무서운가봐.”
김석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송아는 그럼 왜 자기와의 동행을 허락했냐고 물었다.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라고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아내감을 찾아다니는 중이라고 말하는 게 옳았다. 김석은 여자를 만날 때마다 아내감이 될 만한 여자인지 살펴보곤 했다. 수니는 뭔가가 부족한 아내였다. 그러니 수니한테서는 진정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았다. 수니가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수니를 절대 울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서 수니와 절대 헤어질 수 없다고 다짐하면서도, 김석의 마음 한 구석에는 늘 ‘부족한 아내’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니 인물이나 인간성이 괜찮은 여자를 만날 때마다 속칭 엔조이하려고 만나는 게 아니라 아내감이 될 만한 여자인지를 염두에 두고 상대하게 마련이었다. 유혜미도 그렇고, 원미라도 그렇고, 지금 송아도 그렇고, 모두 아내감을 찾다가 만난 여자들이었다. 그 세 여자 중에서도 맨 처음 알게 된 유혜미는 묘한 아가씨였다. 유혜미는 김석을 웃기기 위해 태어난 여자 같았다. 오죽해야 수니도 유혜미 얘기만 나오면 화가 치올랐다가도 끝내는 웃고 말았을까.
수니와의 부부싸움이 전성기일 때 만난 유혜미는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아가씨였다. 김석이 친구인 하기철 아나운서와 술집에 들렀는데 옆자리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유혜미가 “하기철 아나운서님 맞죠?” 하고 이쪽으로 와서 합석했던 것이다. 그때 유혜미는 김석에게 각별한 친밀감을 보였는데 바로 그 이튿날 김석을 술집으로 불러냈다. 처음에는 술집 여자로 착각했지만 알고 보니 귀한 집 고명딸로 착하고 순박한 아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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