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 대신 감동시킨다가 결혼조건
김석은 사랑에 대한 소회를 계속 이어나갔다.
“벌벌이가 사랑을 구원이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야. 사랑은 신앙차원의 절대가치여서 영구불변이야. 사랑하니까 결혼한다면 이혼하지 말아야지. 연애시절의 사랑은 평생 변질되지 않을 테니까, 안 그래?”
“그럼, 사랑으로 맺어진 게 아니면 뭘로 맺어진다는 거죠?”
불쑥 송아가 나섰다.
“감동이죠. 그러니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감동시켜줄 사람으로 알고 결혼하는 거죠. 그대를 사랑해요가 아니라 그대를 감동시켜줄게요가 맞는 표현이죠. 이제는 노래의 가사도 바꿔야 해요.”
“그라모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 아이고 감동이 눈물의 씨앗이다, 그 말이제?”
벌벌이의 말에 서 장군이 맞장구를 쳤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가 아니라 감동해선 안 될 사람을 감동하는 죄이라서겠군.”
그러자 이번에는 읍장이 노래가락으로 맞장구를 쳤다.
“사아랑의 노오래 들려오온다아, 대신 가암동의 노오래 들려오온다아.”
“내도 결혼식 다시 올려야갔다. 그래야 감동시킬라꼬 용쓴 거 표내지러. 말로만 지껄이모 쓰겄나? 내 집사람한테 이럴 끼다. 여보, 우리 감동시켜주기로 약속한 거 잊아뿌지 마래이. 이혼하기 싫으니까네. 알갔나?”
벌벌이의 구성진 익살에 장 교수가 토를 달았다.
“사랑해요를 감동시켜줄게요로 바꾼 그 가치전복현상(價値顚覆現像)이야 말로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학설이지. 사랑을 감동으로 대체한 혁명만큼 더 큰 혁명이 어딨겠어. 국가를 뒤엎고 대륙을 뒤엎는 혁명은 있어도 수천만 년 흘러온 인류사를 한 순간에 뒤엎는 혁명은 없을 거라구.”
“그라고보이 오늘모임이 그 위대한 혁명의 시발점이 돼뿌맀네.”
“그런데 말야. 사랑이란 말은 귀가 닳도록 들어서 익숙한데 감동이란 말은 영 실감이 나지 않아.”
읍장의 말이었다.
“오정수 니는 딱 시골 읍장 깜이데이. 수준이 그 정도뿌이 안 되나.”
벌벌이의 말에 읍장이 발끈했다.
“벌벌이 너도 촌놈이야. 한번 촌놈은 영원한 촌놈이라구.”
“그라고보이 문 회장도 촌놈, 읍장도 촌놈, 서 장군도 촌놈, 장 교수도 촌놈, 박 이사도 촌놈, 김석이도 촌놈, 나도 촌놈, 마큰 촌놈이제?”
벌벌이의 말에 박 이사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문 회장은 촌놈이 아니고 촌년이지.”
그러자 문희숙이 나섰다.
“그래, 나 촌놈이 아니고 촌년이다. 에에 참 똑똑하다. 그래, 내가 여자라고 꼬장꼬장 따져 되겠니? 꼬장꼬장하니까 재벌 중역이 됐겠지만.”
“참, 너희들 학교 다닐 때 짝짜꿍이었지?”
서 장군의 말에 문희숙이 해명했다.
“학예회 때 나는 암퇘지 역을 맡고 박 이사는 수퇘지 역을 맡아 친해졌지. 그런데 지금은 꼴도 보기 싫어. 저 따지는 꼴 좀 봐라.”
“맞다카이. 하지만도 인자 씰데없는 소리 고마하고 읍장 말 대로 추억담이나 나노자.”
농담 분위기가 가라앉자 여기저기서 추억담이 꽃을 피웠다. 김석이만 옆좌석이 송아여서 외톨인 셈이었다.
“왜 저한테는 한 말씀도 없으세요?”
술기운이 오른 송아가 김석에게 말을 걸었다. 김석은 여전히 미소만 지었다. 송아는 자기에게 술잔을 건네지 않은 사람은 용석뿐이라며 비아냥거렸다.
“너무 도도하시네요. 나도 쓸 만한 물건인데 이처럼 박대하다뇨.”
용석은 마지못해 술잔을 건네주고 잔을 채웠다. 송아는 미모인 데다 성격이 서글서글해서 붙임성이 좋았다. 오십대 중반인데도 처녀처럼 젊어보였다. 말투도 해학적이면서 간드러졌다. 하지만 김석은 회식이 끝날 때까지 겨우 한마디만 건네주었다.
“좀사내라 말주변이 없어서요.”
그 말을 송아가 삐딱한 말로 받았다.
“자신을 좀사내라고 낮추는 걸 보니 겁나는 분이네요.”
김석은 여전히 미소만 지었다. 그런데 보름쯤 지나 전화가 걸려왔다. 차 한잔해요. 간단했다. 김석도 간단히 대답했다. “그러죠 뭐.” 그게 화근이었다. 한 번 만난 후로는 시도 때도 없이 송아의 전화가 걸려왔다. 안 만나주면 집으로 쳐들어가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김석은 할 수 없이 송아와의 밀회를 약속했다. 수니한테는 동창 댓 명이 일박으로 떠난다는 핑계를 댔다. 멋진 위장술이었다. 송아는 약속 장소인 마을 입구에서 김석을 차에 태우고 경춘고속도로 쪽으로 달렸다.
“그냥 동해안으로 달릴까요, 좀 멀어도 서해안 쪽으로 꺾을까요?”
“가고 싶은 데로 끌고가요.”
“수도권 사람들은 동해안 가는 게 버릇이라.”
“물 좋고 산 좋아서 가는 걸 버릇이라. 표현이 참 멋지네요.”
“저 봐, 비웃는 것 좀 봐. 그럼 서해안으로 바꿀까요?”
“서해안도 매력이 철철 넘치지만 예정을 바꿀 것까지야 없죠. 나야 동해안과 서해안 사이에 낀 사람이라 동해나 서해나 반반이지만.”
“충청도 사람은 저렇게 어중간 하더라.”
“나만 그래요. 다른 충청도사람들은 모두 송아 씨처럼 분명하죠.”
톨게이트를 지나자 송아는 본격적으로 수다를 떨었다.
“우리처럼 속전속결로 처리한 경우도 없을 거에요. 그 만큼 첫눈에 꽂혔다는 증거죠.”
“국문과 출신은 말투가 원래 그래요?”
“나만 그래요. 성질 급한 핏줄 탓이죠. 게다가 당신이 너무 멋져서.”
“당신이라니, 말을 삼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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