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아내 찾아 90000리(제 14회)

충남시대 2022. 9. 29. 11:29

소설 『샹그릴라』 - 동네거지 을돈의 덕담

윤리분과회장은 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계향이와 네 아내도 현실을 직시하고 자식에 대한 분노를 삭이도록 하라. 물론 네 자식들에 대한 계향의 닦달은 엄포겠지만.”
  “엄포라고요?”
  “계향이는 너보다 속이 훨씬 깊고 넓은 여자니라.”    
  “사실은 그래서 계향에게 모든 재산을 맡겼던 것입니다.”
  “자식들한테도 미리 나눠주지 그랬나. 직업이 없는 자식도 있던데?”
  회장은 은근히 필봉의 속을 떠보았다.
  “안됩니다. 제 자식들에게 주느니 차라리 길바닥에 버렸을 겁니다. 그놈들은 천륜조차 무시할 수밖에 없는 놈들입니다.”
  “어허, 분노를 삭이라 해도 내 말뜻을 못 알아듣는구나.”
  그때였다. 염라대왕의 엄한 목소리가 회의장을 긴장시켰다. 분과회장들과 심사원장, 그리고 저승사자들은 모두 자세를 바로 세웠다. 필봉은 그동안 소탈하게 지내온 대왕의 엄숙한 태도에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푹 숙였다. 
  “필봉은 듣거라. 솔직히 말해서 너는 네 자식들보다 더한 불효자였다. 너는 부모 속을 지독히 썩인 놈이다. 너를 벌써 지옥에 보냈어야 옳았지만 을돈이의 부탁을 이행하려고 봐준 거다.”
  필봉은 을돈이란 말에 몸이 떨렸다. 마음 속 깊이 잠겨 있던 앳된 추억이 회오리를 일으켰던 것이다. 옛날 필봉의 고향 마을에는 다리를 저는 홀아비 거지가 있었다. 동네에 잔칫집이나 초상집이 생기면 심부름 따위로 끼니를 때웠는데 경조사가 없을 때는 바가지를 들고 집집마다 다니며 밥을 구걸했다. 다리를 절며 사립문 밖에서 얼쩡거리면 아낙들은 동냥바가지에 찬밥 한 덩이를 담아주었다. 하지만 필봉네 집에서는 아버지가 집안에 불러들여 겸상으로 대접했다. 필봉이 초등학생 때인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방에서 아버지와 겸상으로 밥을 먹던 을돈이가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어르신께서 생전에 못 받으신 복은 자손이 받을 거구먼유.”

 

  잠시 옛 추억을 더듬던 필봉은 울컥 치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염라대왕이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인고?”
  “대왕님! 저는 제 자식들의 효도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불효자로 키웠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앉아계신 방바닥에 부엌칼을 꽂은 놈입니다. 제발 저를 지옥으로 던져주십시오!”
  “왜 그런 불효를 저질렀는고?”
  “저는 젊은 시절을 노름으로 보낸 탕아였습니다. 돈을 잃을 때마다 부모님을 괴롭혔습니다. 때로는 울부짖고 때로는 협박해서 논을 팔고 밭을 팔도록 잔꾀를 부렸습니다. 부모님은 하나뿐인 자식의 탄식과 애걸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시고 끝내는 논밭을 날리고야 말았습니다.”
  “화투에 손대지 않겠다고 반성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느냐?” 
  “노름은 제 고질병이었습니다. 화투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몸에 익혔습니다. 처음에는 성냥치기로 시작했습니다.”
  “성냥치기라니?”
  “그 시절에는 생활필수품인 성냥이 무척 귀했습니다. 성냥 한 갑을 사면 한 개비라도 아껴 쓰던 시절이었죠. 저는 형뻘 되는 총각들에게 홀려 하룻밤에 도리지꼬땡으로 성냥 한두 갑을 날리곤 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성냥 대신 돈내기를 하게 되었고 종국에는 논과 밭까지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유행하는 고스톱은 칠 줄도 모릅니다.”
  “부모님한테 꾸지람을 듣지 않았느냐?”
  “어릴 적에는 종아리도 무수히 맞았고, 아버지가 작대기를 휘두르시면 뒷산 골짜기로 튀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부모님 앞에서 칼 들고 설칠 정도로 포악해졌습니다.”
  “그런 놈이 언제 속을 차려서 재산을 모았는고?”
  “아버지가 품팔이꾼으로 전락하시고 어머니가 백내장으로 앞을 못 보시게 되자 제가 환장하게 되었지요. 제 창자가 뒤집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속을 차렸다? 제법이군. 그래서 네놈을 곁에 둔 것이니라.”
  “대왕님께 거듭 애소하옵니다. 저 같은 불효막심한 짐승을 당장 지옥으로 던져주십시오. 지옥불에 자글자글 타죽도록 선처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 영혼은 썩게 마련입니다.”
  염라대왕은 지옥분과회장에게 견해를 물었다. 
  “대왕전하, 필봉은 지옥을 면할 자격이 있사오니 엄중히 말씀드리면 천당분과회장의 소관이옵니다.”
  염라대왕은 천당분과회장의 견해를 물었다. 
  “제 견해는 이러하옵니다. 아무리 구원책을 강구해봐도 지옥은 면할 수 있을망정 천당행은 불가능하옵니다.”
  “내가 선처하겠다면 어찌하겠는가?”
  “절대 아니 되옵니다. 수만 년 이어온 윤리규범을 한순간에 고칠 순 없사옵니다. 대왕전하, 감히 의중에 거역한 저를 응징해주시옵소서!”
  “아닐세. 내 생각이 짧았네. 천당분과회장의 그 대쪽 같은 심지가 저승세계의 거룩한 위의를 영원히 빛낼 거요.” 
  염라대왕의 말씀이 끝나자 이번에는 이승죄업심사원장이 나섰다.
  “대왕전하, 천당분과회장의 심지가 가상하오나 재심을 거쳐 필봉의 선처 방안을 모색한다면 구제가 가능할 수도 있아옵니다.”
  이승죄업십사원장의 진언에 필봉이 소리쳤다. 
  “대왕전하, 절대 아니되옵니다! 저를 구원해주시는 것은 저를 타락시키는 것이옵니다. 저는 그 은혜를 입을 수 없아옵니다. 제 구원책은 오로지 지옥불에 태워지는 화형뿐이옵니다. 하오니 저를 지옥에 던져주시옵소서!” 
  “네놈의 심성이 가상하도다. 심사원장은 재심을 청구하도록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