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문리대와 법대 동향
업무는 쌓여가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보과장이 김석을 과장실로 불러 어디 아픈 데가 있느냐고 물었다. 과장은 채증 업무 담당인 김석을 무척 아껴주는 상사였다.
“가장 모범적인 정보형사가 왜 넋을 놓고 지내나?”
“사실은 집에....”
“무슨 일인데 그래?”
“말 못할 일이 생겨서요. 그러니 휴가를 내주셔야.....”
“뭐야? 이 사람이 돌았나, 서울대 동향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데 갑자기 휴가타령이야? 사연이 있겠지만 채증업무의 중요성을 자네가 더 잘 알잖나. 문리대놈들은 모의재판을 관철시킬 모양인데 자네가 아니면 누가 행사장에 침투하겠어. 우리 식구 중에서 자네가 가장 학생답잖아. 그리고 법대놈들은 성모병원에 있는 전태일 시신을 인수할 계획인데 시신을 감시할 적임자가 자네잖아. 이런 와중에 휴가라니, 어림없는 소리 마!”
“그럼 주말쯤에는 허락해 주십시오. 불가하시면 무단결근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갈이 쎄군. 도대체 이유가 뭔데?”
“출산을 앞둔 아내가 위태롭습니다.”
“위태롭다니?”
“임산부가 땡전 한 푼 없이 사라졌습니다.”
“허허, 큰일은 큰일이군. 자네 바람 폈나?”
“바람피운 게 아닙니다. 꾸중할 일이 있어 화를 좀 냈더니....”
“하기야 자네 같은 모범생이 바람피울 리가 없겠지. 너무 걱정 말고 주말까지 두 건만 잘 처리해.”
“감사합니다.”
“그깟 가출이야 고민거리도 아니네. 더 살다보면 별별 일이 생길 거라구. 그러니 결혼생활을 지옥생활로 여기면 마음이 편해지네.”
정보과장은 김석의 어깨를 툭 치고 사무실을 나갔다. 첩보를 써낸 김석은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수니를 찾아볼 곳이 없었다. 부모 몰래 가난뱅이를 따라 서울에 온 수니는 친구는 물론 형제들과도 소식을 끊고 지내는 실정이었다.
문리대생들의 간담회와 모의재판은 온종일 계속되었다. 김석은 학생풍의 복장을 갖추고 동숭동에 있는 문리대로 침투하여 간담회가 열리는 학전살롱으로 갔다. 입구에서는 두 학생이 입장 학생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김석은 학생티를 내려고 손에 책을 들고 입구를 통과했다. 간담회는 총학생회 주최로 개최되었다. 참가 범위는 서울대 법대, 음대, 의대생 말고도 서강대, 성균관대, 연세대, 고려대생이 다수 참석했다. 간담회 요지는 이러했다.
1, 지금까지의 학생운동이 학생회가 주최하는 운동과 소위 문제학생들이 전개하는 운동 등으로 이원화되어 있어 이를 일원화해야 한다.
2. 학원사찰과 황색문화에 대하여 막연한 내용으로 규탄하기에 앞서 구체적이고 대안이 있는 학생운동을 전개하여 실리를 얻어야 한다.
3. 지금까지의 학생운동이 일부 학생층 중심이라는 지탄을 면치 못했는데 각 대학 연합으로 참여도를 높여야 한다.
간담회는 오후 늦게야 끝났다. 문리대 학생회가 주최한 모의재판은 동숭동 서울대 강당에서 밤 여덟 시부터 열렸다. 행사장에는 교수와 학생 다수가 참석하고 있었다. 김석도 그들 틈에 끼어 의자에 앉았다. 자리가 정돈되자 이내 막이 올랐다. 소위 학림공화국(學林共和國) 최고재판소장의 주심으로 열린 풍자극의 내용은 ‘반사회행위규제법 위반자에 대한 공판’이었다.
김석은 풍자극 요지만 적어서 얼른 회의장을 나왔다. 밖에는 어둠이 깔려있었다. 쌀쌀한 교정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외로움이 느껴졌다. 발에 낙엽이 밟혔다. 교문을 빠져나온 김석은 택시를 잡기 위해 길을 건넜다. 그때 종로 쪽에서 교통경찰관 하나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가로등에 비쳤다. 퇴근길인 모양이었다. 얼굴을 마주치고 보니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직원이었다. 김석이 정보과로 발령 날 때 그는 교통과로 발령이 났었다. 전라도가 고향인 그는 평소 지역감정에 불만이 많던 직원이었다. 반갑게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혜화동 쪽으로 가다가 대폿집을 찾아들었다.
“정보과는 바쁘겠구먼. 서울대가 설치는 데다 내년 대선 땜에 말야. 암튼 자네들은 열심히 여당표를 모아줘. 그래야 나는 만년 교통 해먹지.”
“죽을 맛이네. 자네야 국물 마시는 재미가 쏠쏠하겠지만. 나도 전라도에서 태어나 교통 해먹었으면 좋겠다.”
“충청도다운 말투군.”
“충청도 말투가 어떤데?”
“맘이 편하잖아. 그냥저냥…….”
“이 사람아, 충청도 무시하지 마. 썽나면 무섭다구. 이순신 장군,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 모두 충청도라구.”
“하긴 그렇군. 이순신 장군도 일본놈들에게 썽내신 거니까.
“그나저나 학생놈들한테 얻어맞고 싶어 밤중에 정복 입고 다니나? 서울대놈들 방금 헤어졌는데.”
“그 자식들 그래도 차 잡아달라고 조르던데. 세 패거리나 합승시켰어.”
“경찰관이 합승을 조장해?”
“귀여워서 그랬지. 돌 던지는 대신 차를 잡아달라니 얼마나 이뻐.”
“아암, 이쁘고 말고지. 그런데 나는 그 이쁜놈들에게 왜 미움 받는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네. 참 직업은 무서운 거야.”
“목구멍 풀칠은 만사의 근본 아닌가? 지금도 책만 끼고 사나? 자넨 원래 학자 아냐? 자넨 암 때고 성공할 거야.”
“자네가 말한 성공이 뭔지를 모르겠네. 나 가난하다고 얏잡아보지 마.”
“어쭈, 그게 똑똑한 수재들 말툰가?”
김석과 교통은 얼근히 취해서야 술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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