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6회)

충남시대 2022. 12. 27. 10:22

국회부의장 최남두 의원과의 대화

 

 “혹, 우울증 같은 것 아닐까요? 자기가 택한 고생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을 테고.” 
  연희가 유서란 말에 말려들자 김석은 속으로 신이 났다.
  “아마 너한테도 찾아올지 몰라. 가슴에 담아둔 사람들과 마지막 정을 나누고 싶을 거라구. 너를 만나러 오면 즉시 나한테 알려야 한다. 절대 유서 얘기는 꺼내지 말고. 한 시가 급하다.”
  “어쩌면 좋죠?”
  “혹시 숙모가 네게 편지 같은 것 보낸 적 있니?”
  “실은....여기 계세요.”
  “뭐라구? 의정부에?”
  “네. 저도 이상한 낌새는 챘어요.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다른 낌새는 없던?”
  “하여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지금 어딨지?”
  “아까 나가시면서 금방 들어온다고 했는데....”
  “근처에 저수지나 바위절벽 같은 거 없니?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
  “도시 복판 쪽이라 몸 던질 곳은 없어요. 건물 옥상 투신은 이목 때문에 못하실 거구. 암튼 빨리 찾아봐야겠어요.”
  “그래 서둘러. 내가 찾아온 건 발설하지 말구. 도망치면 큰일 난다. 유서를 써놓은 사람이 나를 만나면 얼마나 민망하겠니. 혹 이상한 말 안하던? 세상 살기 싫다거나, 자기가 잘못한 게 있다거나....”
  “아직은 못 들었어요.”
  “일찍 찾게 돼서 그나마 다행이다. 며칠만 더 지났으면 시체가 됐을 텐데, 그럼 어서 찾아봐. 나는 집 근처 골목에 숨어 있다가 뒤따라갈게.”
  “십중팔구는 놀이터에 계실 거에요. 어제도 놀이터에서 애들 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연희는 서둘러 놀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오래지 않아 연희와 수니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드디어 수니의 초라한 모습이 골목 어귀를 스쳤다. 김석은 울컥 슬픔이 치올랐다. 달려가 와락 껴안고 싶지만 참아야 했다. 골목을 나와 몰래 뒤를 밟았다. 연희가 숙모를 앞세워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그제야 두 사람과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런데 웬 일인지 외삼촌을 바라보는 연희의 얼굴에 칼날 같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유서? 내가 바보지. 그 말을 밑다니!”
  연희의 갑작스런 공격에 김석은 어리둥절했다. 외숙모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유서가 들통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김석은 끝까지 유서로 버틸 참이었다. 그 수밖에 없었다.
  “숙모가 뭐랬기에 그래? 유서는 진짜야.”
  “격투가 볼만 했겠네요?”
  “숙모가 싸웠다고 하던?”
  “그건 여기 마님께 물어보시지.”
  “아아, 숙모가 싸웠다고 했구나. 아마 유서가 민망해서 둘러댔을 거야. 하여튼 모든 게 내 잘못이다. 여보, 그렇지?”
  “여보 소리는 듣기가 거북해요. 그냥 이름을 불러요.” 
  모처럼 수니가 입을 열었다.
  “응 그래. 당신은 젊으니까.”
  “당신 소리도 빼요. 그냥 수니라고 불러요.”
  “두 분 노시는 꼴을 보니 소름이 끼치네. 아이구, 징그러워!”
  연희가 달덩이만한 웃음을 날렸다. 서울행 버스에 오르자 그제야 수니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풀어졌다. 김석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꾸며낸 유서 얘기가 왜 들통난 거지?”
  “놀이터에서 애들 노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연희가 찾아와서 갑자기 눈물을 짓는 거에요.”
   “그래서?”
  “삼촌 같은 좋은 분과 사는데 왜 죽어? 그러는 거에요. 아하, 무슨 곡절이 있었구나싶어 파고들었죠. 어서 실토해봐. 삼촌이 뭐래던? 그랬더니 숙모가 죽으면 삼촌도 따라죽는다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유서를 써놓고 사라졌다는 거죠. 그제야 눈치 챘죠. 유서 핑계를 대야 연희가 나를 수월하게 넘겨줄 테니.”
  “유서 핑계가 아니면 당신이 의정부에 온 걸 당분간 숨겼을 거라구.”
  “나 역시 마찬가지에요. 다투고 집을 나왔다고 해야 내 입장이 서죠. 밥 썩힌 걸 내세울 순 없잖아요.”
  “이번에 큰 걸 깨달았어. 내가 당신의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입 발린 소리 작작해요, 밥상도 첨 차려보고, 설거지도 첨 해보는데, 찬밥 쉰 걸 깜빡했다고 그처럼 빈정거려요? 도 래 미 파 음계에 빗대어 흉보다뇨? 그게 나를 사랑하는 남자의 행실에요? 이참에 아주 헤어져요. 자기는 자기 수준에 맞는 여자를, 나는 내 수준에 맞는 남자를 물색하자구요.” 
  “물색해봐. 온세상을 다 뒤져도 나 같이 착한 남자는 없을 걸?”

 

      *

 

  겨울이 다가오자 가두시위가 뜸해졌다. 김석은 모처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벌써 서른 살에 접어들고 있었다. 20대를 허비했다고 생각하니 무엇에 쫓기는 기분이었다. 눈이 내리는 날 오후였다. 국회 부의장인 최남두 의원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시간 나면 집에 들러달라는 전화였다. 아버지뻘인 최 의원은 하버드대학을 나온 지성인으로 정치가라기보다 학자풍이었다. 그는 학구적인 김석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오늘은 눈도 내리고 시간여유도 생기고, 어때?”
  전화를 받자마자 김석은 경찰서를 나와 이화동으로 향했다. 거실로 들어서니 계단 입구에 서 있던 최 의원이 김석의 어깨를 감싸안고 2층 서재로 데려갔다. 다탁 위에는 이미 다과상이 차려져 있었다. 최 의원은 서가에 꽂힌 책 한 권을 빼내왔다.『人間相』이란 자서전인데 ‘金石 惠存’이 적혀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잘 읽겠습니다.”
  “주변 친구들에게만 몇 부 돌렸어. 내 마지막 저서일지 몰라.”